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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Sep 04. 2024

가만히 있는 건 '얼라'가 아니다.

내 시댁은 마산이다. 집안일이 있어 지난 주말에 마산 시댁에 내려갔다. 집안 청소와 정리를 위해 이방 저 방을 헤집고 다녔다. 그때 안방 장롱 안쪽 구석에서 사진 액자가 하나 나왔다. 아들아이 백일 사진이었다. 백일 사진을 찍고 액자를 두 개 만들어 하나는 친정에 하나는 시댁에 드렸는데 한동안 안 보이던 백일 사진이 장롱 구석에서 나온 거였다. 사진 속 백일짜리 아들내미는 올망졸망하니 그저 귀엽기만 하다.


3년 뒤 아들은 개구쟁이가 되었고 오빠가 되었다.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개구쟁이는 가만히 누워있는 여동생을 장난감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뻔히 보고 있는데도 눈알을 푹 찌르기도 하고 뺨을 철썩 때리기도 했다. 곰돌이나 강아지 인형을 조물딱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둘 사이를 항상 감시해야 했다. 아들이 귀엽다고 한 행동이 동생에게 해코지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기를 몇 개월, 이제는 개구쟁이도 누워서 버둥거리는 것이 인형이 아니라 사람인 것을, 동생인 것을 알게 된 때가 마침내 도래하였다. 그래서 나는 둘만 남겨두고 집안일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정 엄마가 도와주러 오셨다. 우리는 오랜만에 거실 대청소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안방에서 놀라고 하고 개구쟁이 큰 놈에게 당부를 철저히 했다. 동생을 막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고.

청소에 집중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안방이 너무도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나는 "아-들이 자나?"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얼라하고 까날라하고 둘이 있는데 떠들고 조용하니 가만있으면 필시 재지리하는 건데. 퍼뜩 안방에 가봐라."


마루를 닦던 걸레는 팽개치고 안방문을 열었다.

아들은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누워있는 딸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딸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딸애의 얼굴을 덮고 있는 건 매일분유 앱솔루트의 아이보리색 분유 가루였다! 분유 가루가 딸애의 눈과 코를 이미 다 덮었고 이마와 빰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방문을 연 순간은 막 아들이 분유를 딸애의 입에 막 한 숟갈 들이붓던 참이었다.


"아들아!!!" 나는 소리를 내었다.

"이제 그만. 동생한테 그러면 안돼~"

분유 숟가락을 든 채로 개구쟁이 아들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 내가 내가 동생 밥 뚜고(주고) 이떳다!(있었다)"

"맞나? 근데 동생 밥을 눈이랑 코에는 와 줬노? 밥은 입에만 주는 거고, 누워있을 때 주면 안 된다. 알겠제?"

아들은 자기는 좋은 일을 한다고 했는데 엄마의 칭찬이 성에 차지 않았다. 찌푸린 얼굴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딸애의 얼굴에 산을 만들어 놓은 분유를 다 치우고 아이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신기한 건 그리 난리법석을 떠는 데도 딸애는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는 거다. 오빠가 자기에게 나쁜 짓을 하려 한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엄마가 말했다.

"거봐라. 내 뭐라 카드노? 얼라들이 조용하이 가만 있으몬 재지리하고 있는 거라 했제? 얼라들은 까불고 시끄럽고 소리가 나야 되는 거라. 조용하믄 그거는 아-가 아이제!(아이가 아니지)"



시댁 식구들과 식당엘 갔다. 맞은편에 예닐 곱살 짜리 여자 아이가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자꾸 들썩인다. 옆에서 아이 엄마는 가만히 좀 있으라고 아이를 다그친다. 아이는 좀이 쑤신다. 몸을 이리저리 앞뒤로 고개를 옆으로 입을 재잘재잘 아주 활발하다.

그 모습을 보던 27살 조카가 말했다.

"우리 어릴 때는 식당에 놀이방이 있어서 밥 빨리 먹고 가서 놀이방에서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했던 거 같은데, 요즘에는 놀이방 있는 식당을 못 본 거 같아요. 가만있는 애들이 좀 안돼 보이네요, 숙모."


그래, 그러고 보니 20여 년 전에는 웬만한 큰 외식 식당에는 커다란 놀이방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가급적 놀이방이 잘 마련되어 있는 '이바돔 감자탕'이나 '바르미샤브칼국수'에 외식을 다녔다. 너도 나도 아이가 있었다. 아이들은 밥을 빨리 먹고 놀이방에 가서 모르는 친구와도 같이 어울려 놀았다. 그동안 어른들은 밥에 집중하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적어지면서 식당 내 놀이방도 줄어들었다. 지금도 놀이방이 있는 곳도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지만 여전히 흔한 것인지 아니면 간혹 볼 수있는 드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아이를 데리고 외식을 하려면 식당과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행복한 외식을 망칠 순 없으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다. 그래서 노키즈존이 늘어난다.

하지만 2~30년 사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는 건, 아이들일까? 서로에 대한 배려일까? 인내일까? 여유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일 수도 있겠다. 갑자기 그 시절 아이들이 뛰어놀던 우리 동네 이바돔 감자탕 집 놀이방이 그립다.



*얼라: <아기>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까날라: <갓난아기>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재지리(저지리): <장난질> <장난> <뭔가 어지르고 사부작대면서 노는 모습>을 의미하는 경상도 사투리. 근래에는 들어보거나 말해본 적이 거의 없는 조금 해묵은 사투리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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