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월 Aug 28. 2024

'함부로' 아니죠!
'함부레' 맞습니다!

인천공항이다. 언니들과 하는 자매들끼리의 해외여행이다. 한창 휴가철인데 비해 인천공항은 여유가 있었다. 우리 비행기 시간이 자정 무렵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작은 언니가 말했다. 


"공항이 헐빈하네. 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했던 거 같은데."

"밤 열두 시가 다 돼서 그런 거 아이가? 이 시간에 비행기 타는 사람이 오데 짜다리 많겠나?"


큰언니가 작은 언니의 말을 이었다. 

그러가나 말거나 나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헐빈하다>는 소리에 혼자 피식 웃었다. 과연 서울 사람들도 <헐빈하다>의 뜻을 알까? <헐빈하다>는 썰렁하고 한산하다는 뜻을 지닌 경상도 사투리이다.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 사람이 와 이라노?'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마음속으로만 애가 닳는다. 다음에 서울 사는 동료를 보면 꼭 물어봐야지. 생각을 해 보았다. 


온라인 체크인을 미리 했기 때문에 짐을 부치는 쪽에 줄을 섰다. 오프라인 체크인 쪽보다 줄이 1/4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앞에 사람이 제법 서 있었다. 우리가 탄 항공사는 온라인 체크인을 해도 탑승권은 카운터에서 받아야 했다. 여권을 미리 챙겨 들고 서 있어야 했다. 내가 말했다. 


"함부레 여권 미리 꺼내서 들고 있어라. 카운터에서 여권 꺼낸다 우짠다 카면서 시간 끌지 말고."

"눼눼~ 알겠심더. 아따야 여권 미리 안 꺼내놨다간 사람 자~ (잡아) 묵겄다."


엄포를 놓는 나에게 언니들이 퉁으로 말을 되돌린다. 큰언니가 별안간 말했다. 


"근데 니는 말하는 게 똑 엄마가 자주 쓰는 그런 옛날 말을 많이 쓰노? <함부레>라는 말을 참 오랜만에 듣는데. 요새는 경상도에서도 <함부레> 같은 거는 잘 안 쓴다. 내 나이 또래도 잘 안 쓰고. 사는 데는 경기돔서 쓰는 말은 우째 사투리가 더 심해졌노? 참 얄궂다."


묻는 언니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몰라. 평소에 사투리 잘 안 쓰려고 신경 좀 쓰다가 오랜만에 언니 너거들같이 친한 고향 사람 만나면 외국인이 모국어 쓰디끼 옛날에 가끔씩 쓰던 말도 막 기억이 나고 튀나오고 그런네. 다 너거가 반가바서 그렇다 아이가!"


생각해 보니 나도 <함부레>라는 말을 써 본 지가 까마득하다. 고향에 살 때도 많이 썼던 단어가 아닌 듯하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나온다, 이번처럼. 


"함부레 준비 단디 해래이."


평소 인지 못하고 있던 죽은 기억들이 반갑고 즐거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되살아 나서 가슴을 울리나 보다. 가슴을 울린 기억은 무엇을 타고 뇌 속에 들어가 어떤 작용을 일으켜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나 보다. 

<선재 업고 튀어>에서 임솔의 할머니 말처럼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스미는 것'인가 보다. 이렇게 영혼에 스몄던 <함부레>는 인천 공항에서 언니들과 함께 한 순간, 갑자기 되살아 났던 것이다. 



*짜다리(혹은 짜달시리): <그다지>라는 경상도 사투리

*함부레: 포털 사전에 <아예>라는 뜻의 경남 사투리로 나온다. <아예>라는 뜻도 있지만 <미리, 사전에>라는 뜻으로 나는 더 많이 사용했던 듯하다. 

이전 23화 시골 오일장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