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부에 위치한 작은 미술관에서 안내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후 햇수로 1년이 넘었다. 주 3일을 근무하는, 1년짜리 단기 계약직이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특히 온 지구가 뜨거운 압력솥 같은 이번 여름에는 미술관 출근하는 날을 더욱 손꼽아 기다린다.
미술관에서 보통 하루에 2~3명 정도가 근무를 한다. 날마다 당번을 정해서 한 명은 안내 멘트를 하고 한 명은 미술관 내부를 둘러보고 점검하는 일을 맡는다. 다른 한 명은 매표를 하면서 입장 인원을 체크하고 간단한 문서 작업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 도와가며 하기 때문에 매일이 힘들지는 않다. 평일에는 찾아주는 손님이 반갑기까지 하다.
미술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닌데 쓰다 보니 서설이 길었다. 우리 미술관은 7월 8월 한창 무더위에 지역 작가 초대전을 개최하였다. 8월 초순 어느 날은 내가 입장하는 손님들에게 관람 안내를 하는 날이었다. 우리 미술관에서 하는 관람 안내는 대개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XX미술관 1관입니다. 저희 이번 전시는 무료로 관람 가능하시고요, 오른쪽으로 입장하셔서 반대 방향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사진 촬영 가능하신데 플래시 사용은 자제해 주시고 동영상 촬영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협조부탁드립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지 않게 손을 잡고 관람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즐거운 관람되세요."
작년에 처음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몇 마다 안 되는 이 말을 하는데도 혀가 꼬이기도 했고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어순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은 환경 적응의 동물. 금세 적응이 되긴 했다.
그런데, 같은 문구인데도 내가 말을 하면 관람객들 중 다수의 분들이 꼭 이렇게 되물어보았다.
"어, 혹시 경상도 분이세요?"
나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라며 화들짝 놀라는 리액션으로 그들의 질문에 화답을 했다. 관람객들은 "말투 들으니 바로 표가 나네요."라고했다. 교과서 읽듯이 또박또박 발음을 했기에 말투에서 바로 표가 난다는 관람객들의 대답이 잘 이해가 안 되어서 다시 되물었다. "말투가 어떻게 다른가요? 사투리도 안 썼는데요." 이 순간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억양이 경상도예요."
억수로, 단디, 천지삐까리, 땐땐모찌 - 이런 단어들이 없어도 억양에서 내가 경상도 사람인 것을, 그것도 경상남도 사람인 것을 사람들은 알아보았다. 요즘엔 각종 매체에서 각 지역 사투리와 관련된 콘텐츠들이 넘쳐나고 출신 셀럽들도 그들의 사투리로 활약을 많이 하고 있어서 타 지역 사람들도 웬만한 지역 사투리는 친숙하게 되었다. 좋은 방향인 것 같다.
반면, 지방에서는 전통적 사투리가 조금씩 사라져 가고 전국이 점차 표준말화되고 있는 것도 같다. 젊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표준말을 쓰는 매체를 즐겨 보니 그 어투에 익숙해지고 있고 전통 사투리를 쓰는 어른들도 줄어들고 있어서일 거다. 내가 잊혀가는 사투리에 대하여 글을 쓴 것도 사라져 가는 단어를 잊기 전에 나라도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경기 남부에 살고 있다. 주위에 경상도 사람은 우리 가족뿐이다. 듣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 수도권 사람들이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말이 표준화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어차피 여기에 살고 있다면 여기에 맞춰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억지로 따라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언어의 현지화가 많이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와서, 8월 어느 날 나는 관람 안내 업무를 하는 순번이었다. 다가오는 손님은 보통때와는 달리 친구로 보이는 성인 직장인 남성 2명이었다. 미술관 여닫이 문을 열고 데스크로 다가왔다. 얼굴에 미소를 장착하고 친절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늘 해오던 멘트를 이야기했다.
"안녕하세요, XX미술관 1관입니다. 저희 이번 전시는 무료로 관람 가능하시고요, 오른쪽으로 입장하셔서 반대 방향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사진 촬영 가능하신데 플래시 사용은 자제해 주시고 동영상 촬영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협조부탁드립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지 않게 손을 잡고 관람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즐거운 관람되세요."
한 번도 꼬이지 않고 억양의 고저도 없이 공영방송 아나운서처럼 이번 멘트는 완벽에 가까웠다! 남자 손님 2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리플릿을 집어 들고 미술관으로 입장하였다. 나는 스스로가 기특했다. 기특한 나를 옆자리 동료에게도 확인받고 싶어서 그들에게 물었다.
"저, 방금 멘트 완전 서울 사람 같지 않았어요? 나 좀 잘한 것 같은데."
뿌듯해하는 내 얼굴을 보며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던 P모씨는 당황해서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L모씨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홍월씨, 무슨 소리하시는 거예요!"라며 '아니야, 아니에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P모와 L모의 반응에 더 당황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분명히 완벽에 가까운, '교양 있는 현대 서울 사람들이 쓰는' 표준어를 구사했다고 자신했는데 당황하는 P와 부정하는 L을 보며 "방금 이게 표준어로 안 들린다고? 이게 무슨 상황이지?"라는 의문을 가졌다.
"아이 여러분, 농담 말고. 방금 저 완전 서울 사람 같았잖아요?" 나는 다시 물었고,
"그건 홍월씨 혼자 생각이고. 누가 들어도 경상도 억양이었는데요!" 그들은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여기 와서 산 지 벌써 5년이고 현지인들과 많이 사귀고 대화를 나누고 해서 내가 조금만 신경을 써서 말하면 사투리 억양이 표가 안 난다고 생각을 했다. 다만, 내가 의식이 없이 편하게 말하면 표시가 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신경 써서 이야기했고 나는 완벽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누가 봐도 경상도 억양'이었다고 하니 뭐랄까,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굳이 사투리를 고칠 것까지야 없지만, 또 굳이 사투리를 고집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를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언어는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더니 반백에 가까운 나이에 이사와서 살기 시작해서 그런가, 주위에 수도권 서울 현지인밖에 없는데도 나의 이 경상도 억양은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편하게 살기로 했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하면 콩글리시시고 일본사람이 영어를 하면 자글리시이고 싱가포르 사람이 영어를 하는 건 싱글리시라고 한다. 인도 사람들이 하는 영어 억양, 미국 발음, 영국 억양, 중동 발음 등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발음도 조금씩(과연 조금일까?) 다르고 억양은 더 많이 차이가 난다. 하물며, 경상도에서 반백의 나이까지 살았는데 이제 와서 노력한다고 뭘 얼마나 표준 억양으로 변할까!
나는 모국어인 경상도 사투리를 쓸 때와 표준어에 가깝게 쓰려고 할 때 서로 다른 기질, 다른 성격이 나온다. 사투리를 쓸 때는 진짜 '나'이고, 표준어에 가깝게 쓰려고 하는 나는 가면을 쓴 나 같다.
진짜 '나'에 가깝게 생활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사투리를 버리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표준말은, 2% 부족합니다.> 연재를 이것으로 마칩니다. 다루지 못한 사투리가 더 있지만 더 많은 단어와 사례를 수집할 때 다시 2탄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브런치북을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글감으로 더 좋은 글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