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보물'이 되었다

아이들의 추억상자가 그들의 보물상자가 되다

by 홍월

나 어릴 때 우리 부모님은 학교에서 받아오는 종이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부모님은 학교에서 받아오는 종이, 그 중에서도 빨간 학교 직인이 선명히 찍힌 종이들을-생활통지표, 개근상 등-노란 서류 봉투에 우리 집 통장을 보관하듯이 소중히 보관해두셨다.


우리 남매가 중고등학생이 되고 난후 우리의 종이들은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여 각자의 품으로 옮겨갔다. 나는 부모님이 보관했던 종이들과 함께 초등학교 때 쓰고 모아두었던 일기장을 같이 작은 박스에 아무렇게나 모아두었다. 언니와 오빠들은 대부분 버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버리자니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결혼을 해서 독립을 할 때 십여년 만에 그 상자들을 열어보았다. 그 때 그 상자는 '그냥 종이'가 아니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오래동안 찾지 않아 회색빛으로 바래서 곧 소멸될 기억들이 다시 소환되었다. 나는 그 작은 상자를 좀더 크고 근사한 상자로 바꾸고서 '종이들'을 지금까지 잘 모셔두고 있다. 이 '종이로 된 기억'들은 소중한 추억으로 나와 함께 끝까지 갈 것이다.



내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고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종이들을 가져왔다. 종이에 있어서 내 것과 아이들 것이 다른 점은 일방적으로 지급되는 종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오는 종이도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공작을 하고 바둑을 하고 발레를 했다. 아이들이 잠깐이라도 적을 두었던 곳에서는 작든 크든 종이들이 생겼다.


나는 종이들을 우리 부모님이 했던 것 처럼 하나씩 둘씩 작은 봉투에 모았다. 세월은 가고 아이들은 자랐다. 종이들이 더 많이 모였다. 나는 이제 각자 하나씩 상자를 따로 배정하여 그 곳에 아이들의 기록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곤 말했다."이제 이 상자의 이름은 보물 상자야. 이 상자는 1호 보물 상자. 2호, 3호는 너희들이 직접 모아보렴. 지내다 보면 보관하고픈 기록과 추억이 무엇인지 알게 될거야."

20200612_145528.jpg 봉투에서 큰 상자로 혹은 상자 두 개로 변화되었다.


처음에 조그만 봉투로 시작한 이 활동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아이들 스스로 모을 것을 고르게 되었고 봉투는 작은 상자가 되더니, 나중에는 상자는 더 커지거나 혹은 두 개가 되었다.


보물 상자안에는 별 것이 다 있다.

학년별 성적표, 가끔씩 받아오던 상장, 방학때 썼던 일기장, 그림 모음집, 공작 모음, 학교 특별활동지, 친구들과 주고 받은 롤링 페이퍼, 생일 카드... ...


지금 보면 조잡한 그림이지만 여섯 일곱 살 된 아이가 그렸다고 가져온 작품집을 대면했을 때는, '신이여 내가 이 아이를 키운것이 맞습니까?'는 심정이 들만큼 대견하다고 생각하였다. 모아진 보물들 중에서도 단연코 제일 손이 가고 눈길이 오래 머무는 것은 바로 일기장이다.

20200612_145938.jpg 보물 상자안의 어린 시절 기록물들


초등학교 때 쓴 일가장을 열어보았다. (허락을 구했다.)

아마도 의무로 쓴 일기장으로 갈겨 쓴 티가 확연했지만 그 속에 휘갈긴 기록과 사실은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 일로 아이들은 이렇게 느꼈구나."


아이들의 일가장은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기록도 되었다. 아이들 일기속에서 그들의 엄마는 아이들과 같이 웃고 야단치고 즐기고 여행했다.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내 30대의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다. 이제와서 보니, 일기를 쓰라고 더 많이 독려하고 의무화할 걸 그랬다. 비록 휘갈겨 쓴 기록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모든 기록이 역사가 되고 보물이 된다.


대학생이 된 지금도 아이들은 그 상자를 계속 채워나가고 있다. 소중한 사람과 다녀온 콘서트 티켓,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와 관련한 수집품, 여행에서 획득한 흔하지 않은 기념품들이 성적표와 일기장 대신 상자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들도 한번씩 상자를 열고 추억을 꺼내본다. 내가 모아준 종이들과 아이들이 모은 기록과 수집품은 이제 그들에게도 소중한 '보물'이 되고 있다.


종이와 글자의 시대는 가고 사진과 영상이 대세라고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인증샷을 남기기 바쁘고 남는 건 사진 뿐이라며 일단 찍기부터 서두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추억을 재생시킬 때, 사진과 영상은 아마 순간일 것같고 글자와 기록의 여운은 더 오래 지속될 것 같다.


우리 집에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금목걸이가 든 보물 상자는 없지만 지나간 과거의 기록들로 채워진 기억과 추억의 보물 상자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집은 부자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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