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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Aug 19. 2020

서울대 간 건 아들인데 왜 저한테 그러세요?

정말 감사하게도 아들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합격통지를 인터넷으로 확인한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만큼은 정말 원 없이 하루 종일 기뻐했다. 이 기쁜 소식을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다. 아니, 저절로 널리 널리 퍼졌다고 해야 맞겠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반드시 천리마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니까.


온 사방에서 '축하한다'는 치하의 메세지와 '한 턱 내라'는 사람들의 희망 어린 말을 들었다. 한동안 내 지갑 속 카드는 많이 바빴다. 이곳저곳에서 긁어대느라. 


축하의 말과 함께 꼭 따라다녔던 질문들이 있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나?"

"아들은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

"학원은 몇 개를 어떤 학원을 다녔을까?"


이런 질문들이 끝나면 거의 매번 나에게 던져졌던 질문도 있었다. 

"너는 아들 서울대 보내는데 뭘 어떻게 했어?" 혹은

"아이를 서울대 보내려면 엄마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이런 질문을 한 턱 내는 자리에서 이후에 한참 동안이나 수도 없이 받았다. "난 해준 게 없어 공부는 본인이 하는 거지"라고 대답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고 내가 뭔가 비법을 숨기고 있는 듯이, 의례히 하는 겸양인 듯이 자꾸 캐물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왜냐하면, 정말로 아들이 공부를 하고 서울대를 가는 데 있어 엄마인 내가 특별히 해준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올케 언니는 "너는 돈 번다고 애들 밥도 잘 안 해주고 인스턴트만 먹이더만. 애들이 밥을 부실하게 먹어야 서울대를 가나?"라며 의문을 가졌고 친한 친구는 "가시나, 맨날 야근한다고 피곤하다고 좋은 학원 정보 같은 것도 모르고 학교하고 교류도 없었을 건데 신기하네"라고 궁금해했으며 직장 후배는 "생기부 채우는 것도 만만찮았을 텐데 각종 활동들을 바쁜 와중에 언제 관리하셨어요?"라며 노하우를 전수받기를 원했다. 


수많은 질문 중 누군가 툭 던지듯 했던 말이 내 주의를 끌었다.  

"전업 주부가 내내 아이를 케어하고 관리해도 어렵다던데, 일하는 엄마가 아이를 서울대 보냈다면 분명히 뭔가 비결이 있을 건데 말이야."

전업주부로 아이만 케어해도 힘들다는데 어떻게 워킹맘이 아이를 서울대에 보냈을까, 저 사람은 아이 공부는 대충 시킨 것 같은데 나도 그 방법을 따라 하면 혹시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과 궁금이 내가 받은 수많은 질문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결론부터 말하면, 아들이 서울대를 간 건과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엄마로서 19년 동안 키운 시간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1할 4푼 5리 정도의 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은 결단코 아니다. 그래서 결코 인사치레가 아닌 대답, "나는 해준 게 없어요."라는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우리 세대가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는 부모의 도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몇몇의 부잣집에서 고액과외를 받기도 했다지만 보통이 평범한 가정에서는 학생 스스로 공부하고 입시와 내신을 준비했다. 대학의 진학할 학과도 내가 정하고 그에 따른 미래도 스스로가 책임지던 시절이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관여할 만큼 지식도 없으셨지만 관여할 의지를 갖고 계시지도 않았었다. 이런 습성이 내 몸과 뇌리에 각인이 되었던 건지 어떤지, 우리 아이들이 공부할 시기에 나 역시 부모님이 보여주신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시간에 혼자 있을 아이 걱정에 초등학교 때에는 낮 시간 동안 학원에 있게 시간표를 짰다. 중학교를 입학한 후에는 남들도 다 간다는 보습학원에 등록 시키키는 했지만 아이들의 공부 관련 일정을 모두 따라가지는 않았다. 학교를 믿었고 일단 맡긴 학원 선생님을 믿었으며 선생님들과 조율해가며 스스로 일정과 진도를 체크하던 아이를 믿었다. 물론 중간중간 간섭과 관여가 아닌 관심을 보여주고 환기를 시키기는 했었지만 강압적으로 공부를 강요하지는 않았던 엄마였다고 나는 자부한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3학년이 되니 아들은 좋은 학원(빡센 학원)을 보내달라고 먼저 요구를 해오기까지 했고 고등학교에서는 반대로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고 그 시간에 내 공부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내게 전하기도 했다. 진학할 학과를 정하고는 생기부를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 활동을 알아보고 챙겨보고 참여하고 노력하는 것도 아들의 몫이었다. 학교에서 무슨 활동이 있는지 어떤 대회가 열리는지 모두 다 챙기기에는 내 에너지는 그곳에 집중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다만, 아들이 학업과 학교 활동과 학교 생활 등에 대하여 조언을 구할 때는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주었다. 


돌이켜 보아도 엄마로서의 역할은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하면 적당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오히려 부족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넘치는 것이 모자란 만 못한 것이라 하였다. 조금 부족한 입시생 엄마 역할이 아들에겐 오히려 자극제와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즘엔 아이가 고3이면 엄마도 고3이라고들 한다. 그만큼 입시가 힘들다는 말일 것이며 힘들어하는 아이를 지켜보고 뒷받침해주는 엄마들도 마찬가지로 힘들다는 아니 더 힘들 것이라는 세태가 반영된 말일 것이다. 때문에 주변에서 SKY에라도 들어갔다 하면 그 노고를 아이와 엄마 모두에게 치하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가 되었다.  


내가 그 노고의 일부라도 치하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공부는 아이들이 혼자 해내야 하는 것이 맞고 엄마는 그저 지켜보고 지지만 해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지와 응원만 필요하다면 아이가 서울대를 들어갔더라도 그 엄마에게 "어떻게 했어요?" "무엇을 했나요?" "언제 했나요?"와 같은 질문은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 아이가 서울대를 다닌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분들이 묻는다. "뭘 어떻게 해주었나요?"

내 대답은 늘 마찬가지일 뿐이다. "죄송해요. 제가 한 게 없어서 드릴 말씀이 없네요."


가끔씩 세상으로부터 관심받는 엄마로 만들어준 우리 아들에게 늦은 인사를 전한다.

"아들아, 수고했어. 네 덕분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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