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생각나게 하는 식물이 있다. 냇가에 수박 하나 담가놓고 뜨거운 햇살 아래 물놀이를 하다 보면 수박은 흐르는 계곡물에 충분히 바깥과 안의 온도를 맞추어가며 시원해져 갔다. 물놀이를 하고 나면 얼마나 빠르게 몸안의 수분은 말라가는지 손가락의 주름이 가득하질 때쯤 나의 머리만 한 차가워진 수박을 계곡 냉장고에서 꺼내어 꼭지에 도구을 대기만 해도 쩌억 갈라지는 여름의 소리. 매미는 돌림노래 같은 합창을 하고 송사리가 빠르게 발을 스치며 지나가는 게 느껴지는 계곡에 발은 담근 채 수박의 빨간 속살을 베어 물었지. 추운 날의 아이스크림보다 더 시원했던 더운 날의 수박한입. 여름의 기억은 초록 바탕에 진한 줄무니 속에 가득한 시원함이다.
줄무늬가 가득한 수박페페
그런 여름의 기억을 닮은 식물이 있다. 동글한 잎 4분의 1 즈음에 수박 꼭지 같은 줄기 달려있는 부분이 있고 꼭지를 시작으로 줄무늬가 있다. 수박의 시원시원한 줄무늬를 꼭 닮은 수박페페는 보기만 해도 여름의 기억이 떠오른다. 수박페페도 햇살을 잘 보고 건강하게 잘 크면 줄무늬가 선명하고 잎에 광택이 난다.
처음에 수박페페를 들였을 땐 잎이 적었는데 잎이 적으면 적은 대로 낭창낭창한 수형이 너무 감성 있다. 화분을 들고 아래위로 살짝살짝 흔들면 가느다란 줄기에 달린 수박들이 살짝 튕기는 느낌으로 통통거리는데 그것 또한 키우는 사람만 알 수 있는 매력이다.
수박페페 한가지를 떼어 내서 따로 심어주었다
수박페페는 햇살을 좋아한다. 한여름에 수박밭에 수박들이 영글듯 햇볕을 쬐어주면 잘 자란다. 이내 빽빽해진 잎들 사이로 자리가 없을 만큼 잎들이 올라오면서 쭈글쭈글해지길래 공중 습도를 맞춰주면서 한쪽을 살짝 떼어 분리를 해본다. 여기저기 엉킨 잎들을 풀고 가지 하나를 뿌리까지 빼서 옮겨 심어 보았다. 수박페페 화분이 두 개가 되었다. 빽빽해서 더디 자라던 수박페페는 공간을 확보해서 그런지 쭈글 하던 잎들이 펴졌고 따로 심어줬던 수박페페는 혼자 화분 하나를 차지해서인지 새로나는 잎들 사이즈가 제법 커졌다.
수박페페는 만져보면 잎의 두께가 좀 있는데 페페 종류가 대부분 그렇듯 건조에 강한듯하다. 대신 습도에는 약하다. 그래서 물을 미리 주지 않고 수박페페가 물을 달라고 할 때 그때 준다. 그게 언제 인가 하면 수박페페 잎을 만져보면 톡톡하던 잎이 좀 얇아지고 줄기가 축축 쳐지면 준다. 건조해서 줄기가 쳐졌을 땐 한 두 잎이 말라서 죽을 수도 있지만 그건 괜찮다. 건조가 아니라 물을 많이 줘서 습하면 그땐 잎들은 우수수 다 떨궈버린다. 한 번은 화분 하나를 분갈이하면서 원하지 않을 때 물을 줬더니 뿌리가 녹아서 잎들이 줄기부터 떨어지며 가을에 낙엽 떨어지듯 속절없이 떨어지는데 마음이 다 떨어지는 줄 알았다.
급하게 흙을 털어 녹은 뿌리를 잘라내고 물에 꽂았더니 잔뿌리들이 다시 나면서 잎들이 살아났다. 한번 죽일 뻔 한 적 있어서 그 뒤부터는 과습에 특히 조심한다. 그리고 수경으로도 수박페페를 키울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물에 꽂아 놓아도 보기 좋아 그 뒤부터 물에 종종 꽂아놓기도 했다.
어느덧 가족이 된 수박페페 가운데 위쪽이 엄마 수박페페이다
잎이 몇 개 없던 화분으로 시작한 수박페페는 이제 수박페페 가족이 되었다. 가장 앞쪽의 아기 수박페페는 아직 줄무늬도 없다. 언젠가는 가질 줄무늬를 생각하면서 오늘도 햇살을 선물한다. 햇볕을 잘 받아 짙어진 다 큰 수박페페들의 줄무늬는 멀리서 봐도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고 빛에 생긴 그림자들은 막대기에 달린 동그라미들 같다. 바람이라도 불면 동그라미들이 흔들리고 그림자들이 춤을 춘다. 이내 마음이 동글동글해지고 뭉글뭉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