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어와 청유어에 대하여.

쿠스타브 쿠르베의 자존감을 이야기하다.

by Celine

나는 어릴 적부터 문방구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곳은 나의 천국이자 환상의 공간이라 표현하면 딱 어울릴 것이다. 어린 시절 크레파스 하나를 언니와 동생 그리고 내가 학교에 돌려가며 미술시간에 사용할 만큼 어려운 생활을 해서 인지 나는 문방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의 집에는 미술도구가 가득하다 못해 굴러다닌다. 나의 아이들이 모두 미술 관련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나의 아이들이 부럽다. 이렇게 미술도구를 맘껏 사용할 수 있다니 너희는 참 좋겠구나 하고 말이다. 내가 어릴 적 동네 문방구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늘 칼로 연필을 깎다가 손을 베이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게 동경과 같던 캐릭터가 그려진 연필깎이, 그리고 각종 색깔의 필기류와 화학물질의 냄새가 가득했지만 알록달록 예쁜 색의 왕자표 크레파스, 짤 때마다 쭉 나오던 동아 수채물감, 바스락 소리를 내던 그 이쁜 색상의 포장지들, 늘 쳐다만 보아야 했던 선반 높이 올려져 있는 귀한 인형들, 겉표지가 다 다른 각종 노트들. 나는 지금도 그 냄새가 가끔 그립기도 하고 생각이 난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가끔 문방구를 들린다. 요즘은 서점과 문방구가 함께 있어 나에겐 더없이 좋은 환상의 공간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합정역에 있는 대형 서점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 평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심리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심리서적 코너를 찾아갔다. 그 당시 나는 나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뒤돌아 보면 당시엔 어떤 방법으로든 그때 나를 옳아매던 덧?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던 듯싶다. 나에겐 누군가의 따듯한 위안과 품이 그리웠고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많은 심리서적들을 읽고 있었다. 불안의 실체가 무엇이며,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왜 사는지 나는 철학자가 된 듯 심지어는 원초적 태생에 대한 문제까지 들춰보기도 했다. 책들의 제목들은 모두 삶에 찌든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알리고 싶어 하는 제목들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권의 책을 들춰보았다. 그러나 그 날 나는 한 권의 책도 구입하지 못한 채 그냥 문방구만 실컷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유는 그곳에 자리한 심리서적들의 공통점이 모두 "당신은 ~~~하십시오", "삶을 바꾸기 위해서 ~~~해라", "바꿔라"등의 명령형의 글들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명령형의 글보다는 청유형의 문장을 선호하는 편이다. "~~해 볼까?",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렇게 상대에게 말을 던지면 상대에겐 그 대답을 위해 한 번쯤 생각할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명령형 문장은 일단,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듯 하는 말투로 나에게는 늘 느껴진다. 마음이 태풍처럼 출렁이는 이들에게 명령형 문장은 그들의 감정을 잔잔한 바다로 만들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감정에서 더 큰 반발이 일어날 수 있다. 그날 나는 서점에서 몇 권의 심리 서적들을 들춰보고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나는 지금 길을 잃었는데 나의 감정을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나에게 왜 결론을 내려서 말을 하는 거지? 하는 의구심과 동시에 화부터 먼저 치밀었다. 그래서 그 날은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상대에게 나의 의견을 전달할 시에는 늘 정확히 대답하는 편이다. "응, 나는 그것이 좋아".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라고 말이다. 때론 아주 정확히 Yes와 No를 과감히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상대에게도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나의 생각을 상대가 정확히 알아야 무언가 판단 내려 해결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도 상대와의 교감으로 인해 수용이 될 때 가능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 있는 곳에 나의 의견을 아무리 말한들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 나의 의견은 하찮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게 된다.


나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사회생활 속에서 상사에게 "저는 이것이 좋습니다". "아니요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이 사회에서 당당히 표현을 다 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직 나의 의견을 다 표현하고 살아가기에 이 사회는 위계질서라는 것과 상, 하로 구분 짓는 것이 관념화되어 있어 사회체계 자체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존재를 알릴 필요성은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자존감 지수를 올려 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을 전달하고 상대와 조율하는 것은 매우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작업임에 분명하다. 나의 경험으로 자존감이란,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나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가끔은 나의 생각을 정확히 말해 보는 습관을 조금씩 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이것은 훈련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므로 조금씩 자신의 상황에 맞게 스스로 시도하게 된다면 어느 날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 있지 않을까? 나를 사회로부터 가두어 두는 것이 습관화? 되어 버리면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 새장에 갇힌 새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자. 때론 자신의 의견을 너무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자신 만의 의견을 고집하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보다 순화하여 상대에게 전달할 때 나의 그 진실성이 닿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작가 이기주의 책 시리즈는 그래서 좋다. 언어와 말에도 품격이 있다는 것. 우리는 상대를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말을 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상대에게 나를 표현함으로써 상대에게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이제 들었어요. 미안해요. 저 내일 집에 갈게요. 엄마? 내가 따듯한 차 같은 것 좀 사갈까요?" 아들의 말에는 사랑이 가득 들어 있었다. 곧 가을에 있을 전시회 준비로 한창 바쁠 시기에 어린 나이지만 엄마를 위해 청유형으로 묻는다. "엄마 따듯한 차 같은 것 좀 사 갈까요?"하고 말이다.



<검정 파이프를 문 자화상/구스타프 쿠르베/1845-1846/45 x 37cm/Musée Fabre France>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담배 파이프를 문 채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으로 액자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모습은 당당하다 못해 오만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사람은 사실주의를 창시한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vet 1819-1877)이다. 사실주의(Realisme)란, 현실을 존중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예술 제작의 태도 또는 방법과 묘사하려는 대상을 양식화, 이상화, 추상화하거나 왜곡하는 방법과 대립하여 대상의 특징까지 정확하고 객관적을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쿠르베는 프랑스의 시골 부잣집에서 자랐다. 그는 농촌에서 생활하였으나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며 살았던 화가이다. 쿠르베는 당시 낭만주의나 신고전주의에 정당하게 반박하며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 참고로 그래서 똘레랑스(Tolerance)라는 말이 생겨났다. 나는 이 단어를 참 좋아한다. 보편적으로 모두를 수용하고 개인을 존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쿠민사태가 벌어지며 시민들은 전근대적 사고에서 근대적 사고로 사회를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이에 쿠르베는 쿠민사태에 가담하여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으며, 기존의 미술계에도 정면으로 반박하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당시 화가들은 귀족과 상류층의 후원으로 생활하는 하위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절대 낮추지 않았다. 예술가로서 자신을 후원하는 후원자들에게 조차 늘 당당한 모습이었기에 위의 자화상에서도 자신을 결코 낮추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자라서 인지 그는 노동이라는 것의 신성한 의미를 담아 노동자들의 실제 모습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방탕한 생활을 왜곡해 그리는 당시의 화가들과 달리 농촌의 비참한 생활상을 조금의 왜곡 없이 그대로 표현하였다. 쿠르베는 미술계에서도 늘 이단아였다. 그는 미술계에서도 찬사를 받아 본 적이 없으며,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본 것들을 꾸밈없이 미화, 왜곡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세상에 자신의 사고를 알리는 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그래서인지 늘 우리의 곁에 가까이 있는 느낌을 받는다. 생소하지 않은 일상들 그래서 친근하다. 가끔은 기괴한 모습의 자화상(이는 사회에 대한 조롱을 담기 위해 스스로 그러한 표정을 지은 것이다)이나, 노골적인 성적 표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모든 이는 쿠르베가 추구하였던 예술의 세계에 대해 그렇게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그러한 쿠르베의 그림이 우리 곁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어 참 다행이다.



<돌을 깨는 사람들/구스타브 쿠르베/1849/159x259cm/oil on canvas/ 국립드레스덴미술관>


쿠르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돌을 깨는 사람들1849>이다. 지금 광부들은 장갑도 없이 맨 손으로 돌을 깨고 있다. 돌을 깨는 노동자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어 망치를 쥔 손의 힘줄까지 역역히 보이고 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쓴 모자로 인해 그의 얼굴은 그늘이 지어져 있다. 그것은 노동자의 지친 마음이 바로 저 그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쪽에는 식사를 위해 준비해 둔 뚜껑이 반쯤 열려 있는 냄비가 보인다. 아마도 지금 돌을 캐는 먼지가 그대로 냄비 속으로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돌을 깨는 사람들은 먼지가 가득 들어 있는 저 냄비 속의 음식으로 식사를 할 것이다. 그림의 왼쪽에는 어린 소년이 보인다. 그는 지금 등이 찢어진 옷을 입은 채로 바구니에 돌을 실어 나르고 있다. 노동자의 삶의 실체는 소년이 학교가 아닌 광산에서 일을 해야 하는 모습과 그의 찢어진 옷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쿠르베가 얼마나 노동을 신성시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담겨 있는지는 이 그림 한 점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쿠르베는 강한 자에게 강한 모습 그리고 사회의 약자들에겐 그들의 아주 작은 심리까지 파악하는 철학가이자 화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쿠르베를 사랑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이다. 사회의 약자들은 힘이 있는 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한다. 사회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늘 약자들에게 명령형의 언어만을 사용하는 그들에게 익숙해진 약자들. 그러나 쿠르베의 등장으로 그들은 자신의 내면적 언어를 대신 표현해 주는 쿠르베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쿠르베는 그들에게 말한다. "걱정 말아요 그대. 당신은 당신으로써 충분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위대한 사람입니다.'이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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