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눈이 높다.
TV 속 정우성, 박보검을 가리키며 잘생겼냐 물어도 늘
수줍게 가만히 계시던 할머니가 지금 누구에게 참
잘 생겼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한다.
‘누구지?’
나는 현관에서 앵클부츠의 지퍼를 내리다가 한 발로
허우적거린다. 소리가 나는 주방으로 가보니
식탁 의자에 앉은 할머니가
왼손으로 보조 지팡이를 지지하고,
오른손에 긴 나무 주걱을 쥔 채 바닥의 고무 대야 안을 힘차게 젓고 있었다. 커다란 대야 안에는 멸치 액젓, 굵은소금, 고춧가루 등에 버무려진 무섞박지가
한가득이다.
"참 잘생겼어. 무 좀 봐. 아주 잘생겼지~"
그녀는 설레는 목소리로 생긋 웃으며 싱거운 거 같으니
어서 간 좀 보라고 재촉한다.
일부러 나 올 때 맞춰서 버무렸구나 싶었다.
'김장철.. '김장철'씨가 또 오셨구나.'
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헝클어진 머리, 엉망진창
주방의 할머니를 보며 버럭 신경질을 냈다.
"내가... 내가 김장하지 말라고 했잖아!! 남들이 할머니
94세라고 하면 방에 누워서 죽만 드시는 줄
알아. 엄마가 엊그제 김장 배추 두 통이나 보냈잖아.
왜 그래. 제발... 그만하라고 했잖아?"
나는 주방에서 거실까지 온통 튄 김치 국물과 고춧가루를
닦아 가며 할머니 속 긁는 소리를 버럭버럭 해댔다.
"이제는 할머니 입맛이 변해서 맛도 없어.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음.. 조금만 했어. 아주.. 조금... 요새 노인정에서
다들 김장하느라 난리야"
"거기 할머니들은 7~80대잖아. 할머니~!!! 제발..."
평생 할머니와 살면서 이렇게
울부짖었던 적이 있었나..
안다. 할머니가 사랑으로 해주시는 요리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복에 겨워 미칠 일인지..
본인은 잘 씹지도 못하지만 같이 사는 손주 사위가
이 섞박지를 얼마나 잘 먹는지!
평생 자식들 해 먹이느라 70년 이상 몸에 밴 습관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잘 걷지도 못하고, 조금만 휘청해도 고춧가루 반 포대를
우르르 쏟아내는 사람이. 우리 집 2.6kg짜리 개가
무청을 소파 밑에 가득 숨겨 놔도
뺏을 힘도 없는 사람이.
올해 유독 구급차를 '타다' 부르듯 했던 양반이...
'이제는 그만해도 되잖아..'
주방 마룻바닥을 세차게 걸레질 치는 내 두 눈이
볼록 렌즈처럼 부풀었다.
몇 년 전부터 손녀가 하지 말라고 펄펄 뛰는 김장을
그녀는 몰래 해야만 했기에.
남편과 내가 출근하자마자 노인정에서 친한 쌩쌩이
할머니를 시켜 김장 무를 두 차례에 걸쳐 사 오게 했고.
오전부터 오후까지 씻고 다듬고 절이다가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버무렸던 것이다.
늘 짜다고 하는 손녀에게 소금을 한 줌 더 넣을지 말지
최종 컨펌을 받을 작정이었다.
그 컨펌이 통과되면 손주 사위에게 대야를 들어
옮겨 달라고까지.
그녀의 김장 프로젝트가 눈에 선했다.
7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7남매를 낳아 기르고,
그 7남매의 손주, 손녀들까지 수년씩 키워 낸 그녀답게
눈치 보여 조금만 했다던 무섞박지가 김치 냉장고
김치통 네 개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락앤락 큰 통
하나를 더 채웠다.
세상에.. 할머니는 카누 선수다.
그녀의 주걱에서 튄 고춧가루가
베란다 앞까지 튀어 있다.
허연 나무 바닥과 새하얀 몰딩에 빨간 고춧물이 물들면
색이 도통 빠지질 않는다.
남편과 나는 한 시간 넘게 비질과 걸레질을 번갈아
후다닥 거리고 나서야 기진맥진한 상태로 그녀를 쳐다본다.
할머니랑 같이 먹으려고 사 온 장작구이
통닭 두 마리가 미지근해졌다.
장금이의 실력과 정갈한 손을 가진
그녀였는데.. 분홍색 내복에 고춧가루가 잔뜩
튀었는 줄도 모르는 그녀는 헐렁이는 내복 안에서
주눅이 들어 움츠리고 있었다.
'너무 다그쳤나..'
나는 커다랗게 잘린 무섞박지 하나를 손으로 입에 넣어
와작와작 씹으며 누그러진 톤으로 우물거린다.
"간은... 간은 딱 맞네. 무가 잘생겨서 달고 아삭 거리네.."
주방 싱크대에서는 어림도 없는 고무 대야를 남편이
화장실 샤워기로 우당탕 씻어 나온다.
'할머니 보물.. 고무 다라이'
이런 갈색 대야 속에 물을 받고 앉아 있으면 할머니가
초록색 때타월로 몸을 빡빡 밀어주었던 때가 떠올랐다.
춥다고 호들갑을 떨면 양은 통에 데워진 더운물을
아주 조금씩 부어 주었던.
물놀이한다고 손가락으로 힘껏 내젓던 물에
할머니의 꽃무늬 몸빼 바지가 흥건하게 젖었던
그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할머니.. 저거 버리면 안 돼?"
"안돼야. 안돼. 저번에 네가 버린대서 여기 아파트 복도
창고에 숨겨둔 건데.."
안된다고 세차게 가로젓는 팔목 아래 시뻘게진 분홍색
내복이 흐물거린다.
"하하하하하.... 칫!~"
이걸 소중한 보물처럼 꼭 숨겨 둔 그녀를 보니
허탈했다가 내일 또 몸살이 나서 오래 누워계시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가
갑자기.. 갑자기 뜨거운 웃음이 쏟아진다.
아... 무섞박지가 익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콩나물 국 시원하게 팍팍 끓여
새하얀 쌀밥을 말아야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수저 위에 오늘 할머니가 담근
무섞박지 하나 올려 아삭아삭 씹어 먹어야겠다.
그녀가 정우성, 박보검 보다 반한 근사한 무.
다음 주에는 맛 좀 볼까...
"이젠.. 안 말릴게. 내 년엔 절대 혼자 하지 마.
꼭 같이 해야 해!"
우리 집 개가 여기저기 물어 다 숨겨 둔 무청
조각조각을 남편과 보물찾기 하듯 누가 더 많이 찾나
내기를 하다 할머니의 조그만 신발 안에서도 발견하고
깔깔 웃는다.
벌써, 김장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