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진짜 기억 못 하는구나"

내가 들은 말이다

by 고니크

"너를 보니까 새삼 또 느낀다. 가해자는 진짜 기억 못 하는구나."


내가 들은 소리다. 난 너무 당황했다. 나를 가해자라고 확신하는 저 분명한 말투부터 심장이 덜컥거렸는데

나를 더 무섭게 한 건 내가 어떤 점에서, 누구에게 가해자였었는지 진심으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저 말을 한 사람은 나의 고모. 우리 집 안의 유일한 여성 어른. 고 씨 가문의 실세.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역할.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 집안을 주도하고 이끌어 나가는 분이다. 항상 맞는 말을 하고 옳은 선택을 하고 성공의 길을 걸어온 사람. 자신감 있는 태도, 당당한 말투, 거센 기세. 나한텐 없는 거. 그래서인지 난 어렸을 때부터 고모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엔 그 주눅을 분노와 반항기로 포장해 애써 감췄지만 어른이 된 나는 내 주눅을 감출 포장지를 잃고 맨 몸이다.


17살의 고재연은 고모 앞에 악을 지르며 달려들었었지만 34살의 고재연은 고모 앞에서 얼음이 된 채로 굳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고모가 무섭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고모가 답답한 지 말을 이었다.


"너, 정우한테 사과해야 돼.

걔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알아?

사과 제대로 해. 전화로 문자로 말고, 만나서 시간을 갖고 제대로 하라고."


아... 맞다. 우리 정우 얘기를 하던 중이었지. 고모의 말에 멈췄던 뇌가 다시 풀리기 시작한다. 방금 전에 나는 고모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요새 너무 불안해요.

돈 많이 벌어서 정우 용돈도 주고

정우가 결혼할 때 결혼식 비용도 제가 대주고 싶은데...

누나가 돼서 돈도 너무 못 벌고..."


그때 고모가 팔짱을 끼더니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내가 10대 때부터 내리 봐왔던 그 표정이다.


"아니?

너 그거 핑계야."


- 네?


"정우한테 용돈 주고 싶다는 거 핑계라고.

너 미안한 거 그냥 그 돈 몇 푼으로 풀라고 하는 거야."


- 저는 예전에 풍족하게 벌 때는 정우 용돈도 주고 그랬는걸요. 제주도 여행 간다고 했을 때도 쓰라고 용돈도 주고. 정우가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준 건데.


"얼마나 줬는데? 10만 원? 20만 원?

얼마나 오래 줬어? 두 달은 갔니?

너 그냥 그때 너가 돈을 많이 벌어서, 남아서 준 거지.

너 아마 그때 정우 말고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돈 썼을 거야."


이때부터다. 나의 사고가 멈춘 게.

왜 고모는 나를 나무랄까. 고모는 지금 나를 가증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가 정우를 위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런 내 마음이 고모에게는 왜 위선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들어보니 고모의 요지는 이랬다.

4년 전, 고모가 정우의 와이셔츠를 맞춰주러 만났는데

정우가 누나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단다. 고모 입장에서는 엉망진창인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멀쩡하고 무던해 보였던 정우가 사실은 힘들고 상처받았다니, 너무 충격이었던 거다.


걱정 없이 잘 사는 줄 알았던 정우. 몸과 마음이 건강한 내 말을 잘 듣고 잘 따르는 나의조카 정우. 그런 우리 정우가 예민하고 반항기 넘치는, 못 된 말을 내뱉고, 날 서 있는 누나 밑에서 고생이 많았구나! 고재연 이 나쁜 년. 뭐... 이렇게 된 것 같았다.


할 말이 없다. 오늘도 고모는 맞는 말을 하네. 아빠, 정우와 함께 살 때 나는 지금보다 더 예민하고, 반항기 넘치고, 못된 말을 내뱉고, 날 서 있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화살들은 집에서 가장 어리고 만만한 정우한테 향했을 것이다. 그래 분명 그랬을 거야. 맞네요. 고모. 가해자는 정말 기억을 못 하네요.


그렇다면 돈이 생길 때마다 정우에게 용돈을 챙겨주고,

얼른 많이 벌어서 정우의 결혼식 비용을 대주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은 그렇게라도 마음의 찝찝함을 날리고 싶었던 무의식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구나. 나는 고모가 생각하는 대로 악마가 맞는가 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큰 상처를 받았는데 받은 사람도 준 사람도 나라서 탓할 곳이 없다. 고모 앞에서는 절대 울고 싶지 않아서 꾹 참았다. 맞는 말만 골라하는 고모가 유일하게 하나 모르는 게 있기 때문이다.


고모,

내내 잘 지내는 줄 알았던 정우의 작은 틈이 고모에게는 크게 느껴지셨나 봐요. 그래서 정우를 고모 등 뒤에 두고 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계시는 거겠죠. 근데요 고모. 사실 저는 내내 잘 지내지도 못했어요. 고모에게 보여줄 작은 틈이 저한테 없는 이유는 제 인생이 틈 그 자체였기 때문이에요. 고모가 이미 알고 계시듯이 고재연은 예민하고 불안하고 감정적이고 외로운 사람. 엄마의 발병 11살, 엄마의 병원생활과 함께한 사춘기, 엄마의 사망 18살, 그 이후 엄마의 부재를 견뎌오며 저는 더 예민하고 불안하고 감정적이고 외로워졌답니다. 무던하고 무신경한 아빠와 정우 사이에서 저도 상처받았고 낫는 방법을 몰랐어요. 우리는 모두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였다고요.


나는 고모한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정우를 괴롭히고 싶어서 일부로 괴롭힌 건 아니었다고, 나도 나만의 사정이 있었다고, 나도 정우한테 아빠한테 상처받고 있었다고, 나에겐 나를 자기 등 뒤로 보내서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근데 생각해 보니 이 마저도 가해자의 전형적이 변명인 것 같아 관뒀다. 고모와 헤어지면 정우를 만나러 가야겠다. 정우에게 진심을 다 해 사과해야겠다.


내가 별말 없이 수긍하는 것 같으니 고모는 기세등등해졌다. 그런 고모를 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다. 고모가 오늘 나를 만나러 온 이유는 , 4년 전 정우의 와이셔츠를 맞춰줬듯이 결혼을 앞둔 나에게 인생 조언과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나를 만나서 결혼 생활 조언, 자금을 굴리는 방법,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고모. 인생이 불안하다고 말하는 나를너무나도 객관적인 근거와 확신 있는 말들로 단단히 붙잡아주는 고모. 나를 악마라고 생각하지만, 나를 아끼는 저 마음은 도대체 뭘까.


고모의 그 복잡스러운 마음이 나에게도 흘러들어온 걸까. 과거 나에게


"너는 키도 작고 못생겼으니까 결혼 빨리 해야 돼.

니 강점은 어리다는 점밖에 없어.

너네 아빠한테 짐 되지 말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결혼할 생각부터 해."


"성인지 감수성? 난 그런 말 처음 들어.

그런 걸 갖고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너 병원에 한 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니니?"


"너 그러면 시댁에서 설날에 친정 가지 말고

시댁 먼저 오라 그러면 안 갈 거야? 정말? 깔깔깔깔깔 얘 좀 봐."


"얘 허벅지 봐. 새언니 닮아서 그렇다니까.

새언니도 허벅지가 굵었잖아, 오빠. 깔깔깔깔깔."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미쳤어? 너 아빠 생각 안 해?

언제까지 니네 아빠 등골 빼먹을 거야? 너한테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모르겠는데, 네 재능. 재연아. 재능이 있다는 건 말이야. 스스로도 바로 아는 거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하고 있는 거. 아인슈타인은 하루 종일 발명하고 공부했대. 그게 재능이야.

근데 지금 뭐 하고 있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너, 취직할 자신 없어서 대학원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거 아니야? 고모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오빠, 얘 대학원은 절대 안 돼. 내가 안 된다고 했어. 어?"


라고 말하며 고모는 나를 무두질했었는데...

고모의 맞는 말에 나는 처맞고 울면서 항상 이를 바득바득 갈았었는데...

이제는

사실은

나는 고모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는 되게 이상한 결론.


나의 결혼생활이 걱정돼서, 도움을 주려고 한 시간 반 거리를 두 시간 전부터 나와 버스 여행을 해서 온 고모를 어른이 된 나는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고모가 밉다. 싫다. 무섭다. 동시에 고모가 안쓰럽다. 멋있다. 고모를 사랑한다. 이런 마음일까. 고모가 나를 보는 마음도? 아, 정말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다.

이게 도대체 뭘까.


가족이라서 그런 걸까. 가족은 깨질 수 없으니까? 아무리 상처를 주고받아도 결국엔 포옹으로 끝나는 게 가족이라는 집단인가.


그렇다면 가족은 좋은 거다.

나는 내 팔다리를 자르고 목을 졸라도 결국엔 나를 안아만 준다면야 언제든 내 몸과 마음을 내놓을 생각이 있다. 나의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다.


고모와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 내 1호 가족 고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나자고 하려고. 만나서 사과하려고. 약속이 있다는 정우에게 조심스레 나 때문에 상처받았냐고 물어보니

... 참나...

정우는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고모가 자기 와이셔츠 맞춰준 것도 기억해 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누나 때문에 힘들었었나? 몰라?'

...

고.모. 쉬익.

이렇다니까요. 이렇다고요, 우리 집 안은.

여자친구랑 통화해야 되는데 나 때문에 끊겼다며 할 말 더 없으면 얼른 끊자는 정우. 끊긴 전화를 들고 허망하게 몇 초 서 있었지만 내 입에서는 가벼운 미소가 흘러나온다.


그래 이게 가족이다.

정우의 무던함이 나를 상춰줬던 때가 있었지만 정우의 무던함이 나를 꼭 안아주기도 하는 거다. 결국에 안아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나도 잘 안아줄 거야. 정우도, 정기도, 아빠도, 고모도. 그래, 이런 게 가족이니까.


PS.

고모에게 상처받은 일을 얘기했더니


"재연아 넌 너 위주대로 기억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어.

너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거지.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설사 그랬어도 그런 의도 아니었어. 너가 의도 파악을 잘 못 한 거야."

라고 대답한 고모.


정우가 나한테 상처받은 건 내가 죽을죄를 지은 거고

내가 고모한테 상처받은 건 나의 기억 왜곡이라고 말하는 고모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고모,

저와 정우는 오랜 시간을 섞이고 찢기고 뭉쳐지고 반죽되며 어른이 되었어요. 우리를 너무 이른 시기에 본 사람들은 우릴 물과 기름 같은 관계라고 봤겠지만 지난한 시간이 저희 사이에 밀가루 역할을 해주었답니다. 이제 우리는 달콤한 케이크예요. 달콤한 케이크가 된 우리는 사과받지 않고도 용서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어요. 정우는 무심한 척 전화를 끊음으로써 저를 용서한 거예요.


사과 받지 않고도 용서할 수 있다니. 이 말이 너무 달콤해서 고모를 만나고 며칠동안내내 곱씹었어요.


고모 저는요. 사과받지 않아도 용서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어요.


고모.




그냥 그렇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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