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또 또 불안이야? 또?

by 고니크

살다 보면 정말 다 살아지는 걸까.


그제 할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83세. 내 미래 지침서. 내가 옛날에 친구 문제로 괴로워할 때도 할머니한테 마침 전화가 왔었다. 내가 그때 물어봤지.


할머니, 할머니한테 제일 친한 친구가 몇 년 친구에요?


30년 친구래.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50살에 만난 거다. 바람 잘 날 없는 내 인간관계에서 난 지금 입지 않아도 되는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잠깐 했다. 지금 누군가와 찢어지고, 누군가를 만나 행복하고, 또 찢어지고 아프고 우는 거 사실 멀리 보면 쓰잘데기 없는 감정소모일수도 있겠단 생각. 그때 그렇게 위로를 얻었었는데, 어떻게 마침 전화가 오셨지? 나는 또 할머니한테 물어봤다.


할머니 살다 보면 다 살아지던가요? 정말 알아서 살아지던가요?

- 그럼 살아지지. 착하게만 살면 돼. 성실하게. 착하게 바르게만 살면 다 잘 살아져.


... 에이. 너무 뻔한 말이잖아. 안 믿겨. <폭삭 속았수다>만 봐도, 착하게 살아온 애순이와 관식이는 늘그막까지 개고생을 하는 걸. 나는 개고생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단 말이야. 착하게 살아서 얻어지는 거 말고, 편하게 사는 거, 조금 여유롭게 사는 그런 비법이 궁금하다고요. 할머니 돈 많잖아. 그래도 할머니는 계속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만 했다.


애매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다음 날. 대회에 나간 정기의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도 수고했어. 잘했어. 말을 해줘야 하는데 나는 눈물부터 난다. 지금 내가 울면 정기가 뭐가 되니. 그런 생각에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내가 우는 건 불안해서야. 나를 위해 반짝이는 삶의 신호가 하나도 없어서. 잘하고 있다고, 잘될 거라고. 이게 그 증거라고. 나한테 확신을 주는 작은 반짝임이 단 하나도 없어서. 전보다 벌이가 적어진 만큼 그 빈 공간을 프라이드와 자존감,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채워야 하는데, 분명 처음에는 그렇게 채워왔는데, 무섭게도 시간은 독이었다.


프라이드, 자존감, 미래 확신 세 놈 모두 내성이 없어. 면역력도 없어. 항생제도 없다.

나약해 빠진 나.

매번 시간은 자비 없이 쳐밀고 들어오고 나에겐 방파제가 없다. 시간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비명을 지르는 건 항상 나야. 시간은 무정하고, 나만 웃었다 울었다 해. 생활은 아주 조금씩 가장자리부터 부스러져 가는데, 놀라서 손을 댈수록 더 쿠크다스다. 난 지금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 너무 잘하고 있는 거야’라는 말이 절실한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신호가 다 부정적이니 나한텐 이제 쫄딱 망할 일만 남은 기분이다.


출근을 하면서 오랜만에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또 똑같은 질문. 살다 보면 다 살아져? 진짜 그냥 다 살아져?

나는 내가 재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져?

애매한 사람들은 애매한 인생만 살다가 애매하게 죽어버려?

왜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지. 내 숨을 막히게 하는 게 뭔지 나도 전혀 모르는 채로 나는 너무 답답해했다.


근데 그 엄마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아빠도 또! 똑같은 소리! 성실하게 살라고. 하루 하루 그날의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내면서 살라고. 착하게 살라고 또 그 소리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면 살아진다고.


아니 그거 말고 아빠!

-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니.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다.


... 참나, 아빠는 내가 34년 인생 처음으로 엉엉 울고 매달리고 있는데 끄떡도 안 한다. 됐어. 이따가 정기 만나서 정기랑 얘기할 거야.


퇴근 후에 정기를 만났다. 난 또 정기를 붙들고 늘어짐.


정기야 너랑 나랑 40살에 뭐하고 있을까? 그려져? 40대의 우리 모습이?

나는 안 그려져. 어떻게 해? 망한 거 아니야?

그 모습이 그려지려면 지금부터 뭐랄까 인생의 스케치 정도라도 그려놔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내 손엔 4B연필이 쥐어져 있지도 않네? 망한 거 아니야?

인생의 윤곽을 그릴 4B연필을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해, 뭘 해야 해,

남들은 이미 다 사놓은 것 같은데 나만 없는 것 같은데 지금.


정말 오늘 하루종일 운다. 정기를 붙들고 또 엉엉 울고 있는데, 정기가 그런다.


살날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데 왜 벌써부터 우냐고. 그 연필 좀 이따 사러 나가면 되지.

- 아니, 정기야 살날이 많이 남아있다는 게 무서운 거라니까.

잘 살면 되지. 우리 둘이 있는데, 차근차근 잘 살면 되지. 뭘 못 하겠어. 잘 살면 돼. 내가 잘 살 거야.


... 아니이. 내 맘은 그 말이 아닌데... 정기는 자기의 대회 성적이 좋아도 나는 울었을 거란다. 좋아도 안 좋아도 어떻든 고재연은 울었을 거라고. 히히거리면서 날 울보라고 놀리는 정기. 하... 말이 안 통하네. 홍정기는 불안이 뭔지 모른다. 아니, 정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다가 문득 뭘 모르는 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정기도 아빠도 83살 할머니도 다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나만 딴 소리를 하고 있네. 뭐야, 내가 이상한 건가? 잠깐, 내가 이상한 것 같네? 어라, 나 왜 이상해졌지? ... 1초 전까지 무지하게 심각했는데 정기가 히히거리자 마자, 세상이 물렁해진다. 어이없다. 이래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 수 있겠나.


정기가 웃자마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뿐이라는 아빠의 말이 들어온다. 그러네... 나는 뭐 방법도 없는 거 가지고 울고 불고 짜고 했었네 바보처럼.


불안을 녹이는 건 강한 확신이 아니라 엉성한 낙관이라는 것을 이렇게 깨닫는다. 여전히 내 가슴 한 켠을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실망감이 가득 채우고 있지만 일단은 흐린 눈을 하기로 했다. 그래, 남들 말대로 해보지 뭐. 최선을 다 해보지 뭐. 내 최선은 글이야.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난 그게 참 좋으니까. 이걸로 오늘 한 발자국 걸은 셈이다.


잘했다! 잘했어!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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