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에 침 뱉는 글

by 고니크

내 얼굴에 침 뱉는 글이 될 수도 있지만,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어서 쓰는 글. 왜냐면 정말 흥미로웠거든.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마시 아침 산책을 하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 구석에 자리 잡은 뒤 마시 목줄을 가장 짧게 졸라매곤 내 몸과 가깝게 붙여놨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탔을 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이건 뭐 당연한 거니까.


아니나 다를까 내려가는 중간에 한 사람이 탔는데, 땅만 보고 들어오는 바람에 마시를 뒤늦게야 발견했다. 그 사람은 큰 소리로 “깜짝이야!!!”하고 놀랐다. 그래 놀랄 수 있지. 별생각 없었다. 그러곤 엘리베이터가 곧 1층에 도착했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그 사람이 날 선 목소리로 “사람을 놀래켜 놓고 어쩜 미안하단 소리 한 마디를 안 하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난 정말 당황스러웠다.


“저희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고, 본인이 혼자 놀라놓고 왜 제가 사과를 해야 되죠?”


- 아니 이것(마시) 때문에 놀랐는데 당연히 사과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있었거나 물건이 있었으면 내가 놀랐겠어? 당신 꺼 때문에 놀랐잖아요 사과를 해야죠!!!!


“강아지가 공격을 했거나 동선을 방해했으면 너무나 사과할 일인데, 저희는 엘리베이터 구석에 가만히 서있기만 했을 뿐인데요.”


공교롭게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어서 함께 걸었다. 그 분은 어쩜 사과 한 마디를 안 하냐면서 나를 싸가지 바가지로 몰았고, 나는 아침에 안 좋은 일 있으신 것 같은데 저한테 화풀이 하지 마시라고 응수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의 동선이 갈리는 갈림길에 서서 내내 각자가 서로에게 해왔던 마지막 생각을 내뱉었는데, 그 말이


“앞으로도 그렇게 사세요”


!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공교롭게, 그것도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저 사람을 미친 또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도 나를 미친 또라이라고 생각한 거야. 우리는 서로가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쭉 살아서 인생 고달파지길 저주한 거다.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난 이 상황이 너무 흥미로워서 발이 동동 굴러졌다.


어쩜 이렇게 타격이 1도 없는 저주를 내뱉을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되게 잘 살 것 같거든. 근데 그 사람도 똑같겠지? 그 사람과 나는 별다른 일 없으면 살아온 대로 쭉 살거다. 누군가에게 미친 또라이가 되고 누군가에겐 아주 사랑스런 존재로 남으면서.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하고 그렇게.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에구 놀라셨죠ㅠㅠ 죄송해요’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성질을 죽인다고 될 일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안다. 상대방의 반응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기꺼이 날 굽힐 수 있게 만들어야 되니깐.


사랑이란 건 참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졌구나. 논리를 뛰어넘고, 합리를 뛰어넘고, 정도와 선도 가볍게 뛰어넘어 놓고는 무자비하게 위에서 찍어내리는 거구나. 저항도 못하고 무릎 꿇을 수밖에 없게. 이렇게 무서운 사랑을 사람들은 어째서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지. 왜 기꺼이 하겠다고 나서는지. 너무나 하고 싶다고 어떻게 바랄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사랑은 도대체 뭘까.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사랑에 대해서 아주 오랜 시간을 생각한다. 사랑스러운 사람은 사랑할 수 있지. 사랑해야 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 그러나 사랑하기 싫은 사람, 밉고 못된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 그렇게 하라고 하면 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야 이 세상이 평화로워질 테니까.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줌마는 진짜 또라이다. 너무 싫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나를 건드리기 위해서 일부로 우리 마시를 '이것'이라고 칭하는 나쁜 의도, 나는 바로 파악했고 그 의도에 맞춰 성실히 기분 나빠해줬다. 잘 살던 나한테 나타나 왜 지랄이냐고 욕도 하고 싶었다. 아줌마의 심기를 살살 건드려서 내 멱살을 잡게 만들고 싶었다. 힘은 내가 더 셀 테니까.

말로도, 힘으로도, 논리로도 그 어떤 면으로도 아줌마를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걸 아는 나는 갈등 상황 앞에서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마음을 먹었다. 그래, 맞다. 나도 만만치 않은 또라이다.


근데 또라이 고재연은 정기를 향해 에떼떼 애교도 부리고 마시의 코, 볼, 발을 깨물며 뽀뽀세례도 날린다. 수민, 아영, 지혜를 너무 따뜻한 눈으로 보는 나머지 두 눈이 울컥 후끈해질 때도 종종있다. 나는 또라이인데, 또라이가 맞는데 또라이가 아니다. 또라이이면서 또라이가 아니라고.

그 아줌마도 그렇겠지.


그 아줌마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 사랑 받음에서 나오는 미소도 보고 싶다.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게 차오르는 순간도 목격하고 싶다. 또라이이면서 또라이가 아닌 그 아줌마의 모든 얼굴을 보면 난 그 아줌마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정기, 마시, 수민, 아영, 지혜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처럼?


나는 갈등이 싫다.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진심으로 바란다.


이제 내 머릿속엔 나를 향해 미간을 좁히고 눈동자를 위아래 훑는 아줌마의 얼굴이 조금씩 지워지고 두 눈을 매끄러운 반원으로 만들고 보조개가 깊게 패이는 미소를 보여주는 새로운 얼굴이 만들어진다.


사랑이 내게 말한다. 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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