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놈들이라고 하는 이유

by 고니크

오전 10시 출근해서 매번 새벽 2시, 더 늦게는 새벽 4시쯤에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돈을 벌기 위해, 프로그램을 꾸려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방송작가인 내 친구들은 모두 다 그랬다. 주변 PD들도 조연출들도 AD도 모두. 그런데 왜 우리가 '방송국 놈들'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시청자를 위한, 시청자에 의한, 시청자를 향한 방송을 만들기 위해 내 청춘을 갖다 바치고 있는데!


나의 의문은 방송국 본사를 나와 외주 제작사 프로그램에 들어가면서 풀렸다. 외주 제작사는 돈이 없다. 정말 돈이 없다. 본사에선 프로그램이 망해도 마음만 아프고 다시 다른 프로그램을 기획하지만 외주 제작사에서 프로그램이 망하면 제작사도 함께 망한다. 외주 제작사는 돈이 없지만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유지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거다.

(*모든 외주 제작사가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또한 본사 제작은 안 그렇다는 말도 아닙니다(?)

모두 과거의 견해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제작 퀄리티를 한없이 낮출 수도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장점도 있다. 외주 제작사는 돈이 없기 때문에 비싼 방송작가를 쓰지 못한다.

어린 연차의 작가들을 데려와 싼 값에 고연차 작가들이 해야 할 일을 시키는 거다. 나는 나의 재능과 청춘을 헐값에 팔아 외주 제작사라는 임당수에 나를 던졌다. 이게 뭐가 좋냐고? 나한테 만큼은 확실히 좋았다.


막내작가 친구들이 메인 작가님의 커피 심부름을 할 때, 에이포용지 스테인플러를 직각으로 찍느냐 대각선으로 찍느냐로 혼나고 있을 때, 취재 잘 못한 것보다 점심 메뉴 선정을 잘 못한 걸로 죄인이 되고 있을 때, 나는 대본작가가 됐다. 입봉을 한 거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나?


이제 나의 스트레스는 일 하나밖에 없을 터였다. 서브작가로서 내가 만약 힘이 든다면 나의 업무, 나의 온전한 실수 때문이겠지. 조연출이 잃어버린 외장하드로 내가 쥐 잡듯이 잡힐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사람들 눈치 보고 기분 살살 맞추는 능력 말고, 아이템을 선정하는 능력, 멋들어진 내레이션을 쓰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일'에서 뿌듯함을 얻고,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나에게 얼마나 위안을 줬는지...

첫 출근 전날 밤까지는 그런 위안에 마음이 평화로워졌었다. 첫.출.근.전.날.밤.까지 말이다.


내 첫 대본 아이템은 [외투에 묻은 얼룩 지우는 법]이었다. 각종 살림 고수들과 세탁 고수들을 리스트업 하는 내게 외주 PD가 말했다.


"당장 내일 대본 넘겨서 더빙해야 돼요. 작가님이 쓰시죠."

- 네?

"작가님이 찾아서 쓰시라고요."


그 말이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간장게장 맛집] 아이템을 하고 있는 세컨 언니가 맛집 사장과 통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언니는 사장님한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장님, 간장 좋은 거 쓰시는 건 저희가 너무 잘 알죠~

우리 간장에 콜라를 한 번 넣어볼까요?

아님 무를 갈아서 명란젓을 버무려 발효시킨다면요?

게를 1차 훈제시킨 다음에 간장에 넣는 건... 무리수겠죠?"


무리수잖아요. 언니...

맛집의 요리 비법을 세컨 언니가 만들고 있었다. 이게 뭐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봤다. 내 옆자리 서브 작가의 아이템은 [한 달 만에 10kg 뺀 다이어트 비법]이었다. 더빙까지 다 마치고 이제 편집 중이었는데 PD는 사례자의 비포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10kg 뺀 거 맞아? 사진상으로는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은데?"


주눅 들어있는 서브 작가 옆에서 PD가 구글링을 시작했다. 구글에 뚱뚱한 여자 몸을 검색하더니 사례자의 비포 사진이 들어갈 자리에 웬 미국 뚱뚱한 여자의 몸 사진을 넣는 것이다.

네????

잠깐만요. 아니 이거 이래도 돼?

미국 여자는 자기 몸이 한국 방송에서 누군가의 비포 사진으로 나온다는 걸 알까? 사례자는? 사례자는 자기의 비포 사진이 남의 몸으로 대체돼도 된단 말인가?


내가 지금 어디에 와있는 거지? 여긴 어디야? 나는 누구야? 이제야 내 현실이 제대로 자각됐다.그러니까 나는 지금 [외투에 묻은 얼룩 지우는 법]을 내가 발명해 내야 하는 상황인 거다. 아니 이거 진짜 말도 안 되는데... 저는요. 빨래는 항상 세탁기로만 해왔거든요. 얼룩 따위 지워본 적 없다고요. 세제로 지우는 거 아니냐고요... 아니란다. 더 신박한 무엇을 찾아내야 한단다. 몰라요... 나는 못 해요... 진짜 모르기도 하고요... 이거는 기만인 것 같아. 이거는 가짜잖아요.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근데 어떻게 해. 해야지. 하라면 해야지. 나는 돈을 받고 이곳에 앉아있는 걸. 여기서 나가면 난 다시 막내작가로 돌아가야 한다.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 돌아갈 수 있겠어?

아니. 못 가. 절대 안 가.

그래. 그럼 해내야지.


나는 샴푸에 소주 한 잔을 섞고 식초까지 몇 방울 떨어뜨리는 나만의 세제를 발명해 냈다. 샴푸는 중성세제고, 소주엔 소독 효과가 있고, 식초에도 뭐 뭐... 있겠지, 기능이... PD는 이 방법이 진짜 통하는지 실험해야 한다며 내가 입고 있던 패딩을 벗게 했다. 그거 내가 가진 옷 중에 제일 비싼 옷인데... 악! 음식물이 묻고 립스틱과 마스카라가 묻은 내 패딩은 다행히 잘 지워졌다. 마음이 놓였다. 내가 만든 비법이긴 하지만 기만은 아니야. 거짓말은 아니야...


그날 밤. 물에 젖어 체감상 다섯 배는 무거워진 패딩을 질질 끌고 퇴근을 하면서 나는 이제 내가 어엿한 방송국 놈들이 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든 대본 하나 털었으니 한 주치 페이 40만 원이 곧 들어올 터였다. 짜증나게 뿌듯했다. 이래서 방송국 놈들이라고 하는 거구나. 그래, 나는 방송국 놈들이야.


에휴...

프로그램 시청률 0% 나왔으면 좋겠다. 아무도 보지 말아라. 볼 거면, 내 코너를 정보 전달이 아닌 유머와 판타지로 봐줬으면 좋겠다. 아니. 아냐, 시청자들이 제발 옷에 뭐 좀 흘리고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얼룩 지울 일은 애초에 생기지도 않게. 그런 생각을 하며 집까지 가는 길 내내 내 눈엔 헌 옷수거함이 들어왔다. 이건 내가 가진 옷 중에 제일 비싼 옷이라는 생각과 이 패딩을 다시는 입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싸웠다. 일곱 번째 헌 옷수거함이 보였을 때가 돼서야 마음의 승패가 갈렸다. 패딩을 곱게 넣었다. 잘 가라, 내 비싼 옷 그리고 내 어떤 것. 양심이랑 비슷하게 생긴 어떤 것을 함께 버리고 뒤를 돌아 나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옮겨가며 서브 생활을 오래 하다가 그 시간만큼 메인작가로도 일했다가 분야를 옮겨와 또 다시 막내작가가 되었다.


어제는 이 팀에 들어온 지 일주년이 되던 날. 기분을 한껏 내려고 내가 가진 옷 중에 제일 비싼 옷을꺼내 입었다. 무려 미국에서 사 온 폴로 니트다. 하얀색 폴로 니트. 토마토소스가 잔뜩 올려진 피자를 먹고, 토마토소스로 만들어진 라자냐를 먹고, 온갖 주황, 하양, 노랑 소스가 범벅이 된 샐러드도 먹었다.


입으로 가져가던 피자에서 소스가 가슴께로 떨어졌고, 그걸 지우느라 팔을 퍼덕거린 바람에 소매에도 주황빛이 물들었다. 포크가 내 니트 구멍에 걸렸고 그걸 떼내느라 더 많은 소스를 묻혔다. 소스를 묻힌 채로 당황한 나의 팔 궤적을 따라 배에도 잔뜩 얼룩이 생겼다. 이런...


회사로 돌아와 니트를 벗어 세면대에 담갔다.

이거 어떻게 지워야 하지?

그때 그 순간에 샴푸와 소주와 식초 생각이 문득 든 나.


돈오점수.

돌아왔구나, 내 업보.


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비싼 옷의 얼룩을 지우며 과거 내가 버렸던 나의 어떤 것, 사는 내내 되찾으러 다녔던 그것이 다시 나를 찾아왔음을 느꼈다. 업보가 되어서 돌아왔구나, 이 녀석. 반가워라. 밖에선 강산이 변하는데 이놈의 방송국 놈들의 그림자는 어느새 나를 쫓아와

한치 변함도 없이 내 발뒤꿈치에 들러붙어있었다.


반성한다.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을래요.

돈을 준다고 해도 거짓말하지 않을 거예요.

입봉하겠다는 욕심으로 아무 곳이나 가지 않을 거야.

막내가 나아. 올바른 막내.


아무리 박박 닦아도 내 하얀색 폴로니트엔 주황얼룩이 선명하다. 역시 얼룩은 세탁기에서 세탁 세제로 지워야만 하는 것이야.


나의 얼룩은 어디서 어떻게 지워야 하는 걸까.나는 세탁기 안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샴푸로도 식초로도 안 될 것 같다. 소주는 뭐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위 외주제작사 썰은 특정 회사나 프로그램을 유추하지 못하도록 과장 및 각색을 쪼매 했슴미다.

혹시나 어떤 프로그램인 것 같다, 어떤 회사인 것 같다고 느끼신다면 그건 100% 우연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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