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적으로 행복해야 하는 날

by 고니크

14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는 타지 않는다.

14층에 호시탐탐 나에게 말을 걸고 나를 따라오고 그러다 불쑥 쌍욕을 하며 달려드는 거구의 지체장애인 아저씨가 살고 있다.

아뿔싸 엘리베이터 두 대 모두 14층에 서 있다.

난 계단을 걸어내려 가기로 결심한다.

오늘은 무조건 행복해야 하는 날이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꿈에서 난 까먹기도 어려운 날짜 5월 5일, 친구의 생일을 3년 연속으로 까먹었다.

너무나 서운해하는 친구의 축축한 말과 표정을 손발을 싹싹 빌며 감당해야 했다.

부잣집 친구는 내 생일에 100만 원어치의 선물을 줬고 자기 생일에 그만큼 돌려받길 원했다.

그때 내 월급은 120만 원이었다.


다음 꿈에서 난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따서 나를 'O사람'이라고 부르던 동료의 인스타 스토리를 통해 N 년 동안 메인작가로 도맡았던 프로그램이 나를 쏙 뺀 채로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도 연락이 없다. O사람도, 후배 작가도, 나를 가족이라 말했던 그 집단의 누구도. 나중에 들어보니 후배 작가가 내 자리로 올라왔다고 한다.


전 시즌 마지막 녹화날이 떠오른다. 오늘이 마지막 녹화인지 아님 연장이 된 건지. 프로그램이 영원히 끝이 나는 건지 전처럼 잠깐만 쉬는 건지. 오늘 마지막 회식이 있는 건지 또 다른 날을 잡아서 만나는 건지. 어리둥절한 채로 녹화가 끝이 났다. 연예인을 엘리베이터에 태워 보내고 눈치를 봤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내가 퇴근하면서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하는지 여느 때처럼 '안뇽~~~'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CP는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고 왜인지 어색한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던 PD는 내 손에 핸드크림을 쥐어준다. 이 선물의 의미는 뭘까? 어정쩡한 기분으로 차에 타 시동을 켜려는데 후배에게 톡이 온다.

[제가 방금 피디님들이 감독님들한테 하는 이야기를 몰래 들었는데요. 오늘이 마지막 녹화 맞았대요.]

이렇게 끝이었다고? 난 우리가 이것보다는 더 많은 걸 나눈 관계였다고 생각했다.

O사람과 후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차단했다.

하지만 O사람에게서도, 후배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나 너네는 차단 안 했단 말이야.

아무래도 모두에게 차단당한 쪽은 나인 것 같다. 이유가 있겠지. 내가 뭔가 잘못했겠지.


계단을 올라가는 건 건강에 좋지만 걸어서 내려가는 건 무릎에 치명적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무릎을 아끼려고 거의 뒤를 돈 채 어정쩡하게 내려오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 됐다.


나는 오늘 자전거를 타고 출근할 거다.

오늘 같이 선선한 날씨에 자전거를 타고 완만한 언덕을 내려가면, 심지어 두 발을 페달에서 떼기까지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리터럴리 행복이다.

바람이 볼을 스치는 감촉, 양 쪽 우거진 나무에서 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순간, 내리막길의 짜릿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아 행복해, 난 행운아야!


지하철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카드를 찍고 내려가니 열차가 마침 딱 와서 선다.

아싸 행운!

만석이라 아쉬워하고 있는 찰나에 마침 내 앞에 앉았던 분이 헐레벌떡 일어나 하차한다.

아싸 행운!

이제 40분 동안 앉아서 갈 수 있다. 책을 읽어야지.


지난밤 꾼 꿈이 또 떠오른다.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골룸이 되어 버린 엄마가 손거울을 사달라고 했다. 자기의 못생긴 얼굴은 하나도 신경 안 쓰일 만큼 화려하고 예쁜 거울.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을 사다 달라고 했다.

나는 중학생. 그때의 나는 폼클렌징으로 세수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아직도 비누로 세수하고,

선크림이 뭔지 몰라 여름마다 동남아사람같다는 소릴 들었다. 가끔 들르는 할머니가 상가 앞 가판대에서 옷과 속옷, 양말을 사다 주면 그걸 입었고 다녔다.

도대체 손거울은 어디에서 사야 하는 거지? 그것도 아주 화려하고 반짝반짝한 손거울을 말이야. 집 앞 상가를 뒤지고, 재래시장을 뛰어다녔지만 화려하고 예쁜 손거울은 없다.

나는 조악하지만 가짜 큐빅이 몇 개 박힌 분홍색 손거울을 고른다. 누군가 직접 색을 칠했는지 얼룩덜룩이다.

이 정도는... 예쁜 거 아닐까? '예쁘다'는 게 뭐지? 우리 집안 아무도 나에게 미추의 기준을 알려주지 않았다.

고양된 숨을 고르며 쑥스럽게 건넨 손거울을 받아든 엄마는 붉으락푸르락 가슴을 들썩인다.

거울을 바닥으로 던진다. 가짜 큐빅과 가짜 진주가 부서져 집안 곳곳으로 날아간다.

골룸이 화를 낸다. 너무너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나한테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화를 낸다.

그리고 나는 영문을 모른다.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의 챕터가 마무리 됐을 때쯤이었다.

중간에 애매하게 안 끊어도 되다니 아싸 행운!

약속 시간보다 정확히 10분 일찍 도착했다. 아싸 행운!

점심시간. 난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몇 개월 전부터 말해왔음에도 계속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주문했던 직원이 웬일인지 나를 위해 야채 샌드위치를 주문해 줬다.

아싸 행운!

회의도, 대화도 모든 것이 거슬릴 것 없는 하루를 보냈다. 진심으로 웃었다. 너무 웃겨서 배가 땅겨올 지경이었다.

내가 낸 아이디어들이 몇몇 받아들여졌고 하던 작업이 모두의 만족을 얻으며 마무리 됐다. 행복한 하루가 아닐 수 없다.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 안. 마지막 꿈이 떠오른다.

친구 나연이가 우리 집 거실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다. 카트라이더인가 크레이지 아케이드인가 메이플 스토리였던가.

빨리 좀 가줬으면 좋겠지만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소파에 앉아 그 아이가 게임하는 걸 바라본다.

그때 집 전화가 울렸다. 엄마다. 엄마는 병원에 입원한 지 반년이 넘었다.


"오늘 온다면서 왜 안 왔어?"


정답은 귀찮아서였지만 말로는 바빴다고 17살의 고재연이 말한다. 내일 갈게. 내일 가려고 했어 진짜.


"엄마가 우리 재연이 너무 사랑해. 엄마가 없어도..."


아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소리를 지르려다가 날 힐끗 바라보는 나연이가 신경 쓰여 안방으로 들어왔다.


"엄마한테도 사랑한다고 말해줘. 재연아 엄마 사랑하지."


나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엄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면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든다.

아, 내일 해줄게. 내일. 내일 만나서 해줄게.


"한 번만 해주지... 내 딸... 한 번만 사랑한다고 해줘~"


나는 입을 꾹 다문다. 대답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눈물이 날 것 같아서다.

엄마를 목놓아 부르면서 사랑한다고 엉엉 울고 싶지만 거실에 있는 나연이가 신경 쓰인다.

나연아 제발 알아서 집에 좀 가주면 안 되겠니? 너 왜 집에 안 가니. 왜. 왜 이런 순간.

그날 새벽 4시. 온 아파트 사람들을 다 깨우는 할머니의 고함 소리가 문 밖에서 들린다.


"문 열어라! 니네 엄마 죽었다! 니네 엄마 죽었다고!"


안 되는데. 내가 분명 내일 아니 오늘 엄마한테 가기로 했는데. 가서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로 했는데.

이제 나연이도 집에 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신방화역이다.

어떻게 딱 상념에서 깨어난 순간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지? 아싸 행운!

카드를 찍고 올라오는데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 우리 집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가 도착해 있다.

저 버스 배차 간격이 30분도 더 넘는 버스인데!

나는 빠르게 달려 가까스로 세이브 인한다.

대~박! 이거 완전 대박 행운!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나. 나를 기다리는 14층 아저씨가 있는지 살핀다. 없다.

휘유유.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아뿔싸.

내 자전거!


행복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던 나.

바보같이 퇴근은 버스로 하다니.

역 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고 있을 내 자전거. 자전거를 가지러 25분을 걸어가야 한다.


이상하다. 분명히 하루 내내 행운이 가득했는데.

내가 어떻게든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했거든.

오늘은 무조건 행복해야 하는 날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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