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길에서 찾은 나의 모습
오전 8시 30분. 청소기로 집안을 대충 밀고 화장대에 앉는다. 선크림을 바르고 팩트로 얼굴을 톡톡 두드린다. 펜슬로 눈썹을 가볍게 정리하고 립스틱 같은 립밤을 바른다. 분칠에 가까운 3분 쾌속 화장을 마치고 식탁에 둔 가방을 들고 나선다. 5분 남짓 걸어, 9월에 오픈한 장소에 도착한다.
불을 켜고 에어컨을 튼다. 큰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1리터짜리 생수통을 꺼낸다. 커피포트에 붓고 100도로 설정한 후 모닝 차를 고른다. 어제와 다른 차를 고르기 위해 마음속으로 유치하게 외친다. '어느 것이 좋을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딩동댕동.' 오늘은 밖에 비가 온다. 주말까지 비 소식이다. 이런 날은 난향과 훈연향이 풍기는 정산소종이지. 작은 티팟에 눈대중으로 3g 넣고 100도에 가까운 물을 붓는다. 차가 우러나는 동안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켜고, 필기구도 준비한다.
내 나이 마흔셋. 아니, 다시 마흔하나. 직장생활만 10년 넘게 해 오다가 생애 첫 창업을 했다. 3년 전, 지금 사는 빌라로 이사 올 때만 해도 여기에 내 공간을 만들겠거니 했는데. 오래된 빌라 1층이지만, 지하가 있다. 거실만큼 큰 공간이라 여기서 글쓰기나 차와 관련한 원데이 클래스를 하려 했지만, 아이들이 먼저 접수했다. 2년 반 동안 여기저기 떠돌며 원데이 클래스 하는 걸로 희망을 대체했다.
대학 졸업하던 2005년 12월, 싱가포르 공항 인턴 지상직으로 채용됐다. 다음 해 1월 초에 곧바로 출국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년이란 계약기간을 채우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 KTX 승무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KTX 승무원들의 파업이 한창이었다. 한국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귀국 전 입사지원서를 넣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두 번에 걸친 면접을 봤고 보름 사이에 내가 소속될 곳이 달라졌다. 거기서 7년을 일했다.
2011년, 결혼도 하고 대학원에도 들어갔다. 출산하고 나면 이 일을 더는 못할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늦깎이 학생이 되었다. 마지막 학기에 첫째 아이가 찾아왔다. 2013년 2월, 무사히 졸업을 하고 태교에만 전념했다. 20주부터 시작된 조산의 위험을 이겨내고 7월, 첫 아이를 만났다.
첫째가 돌이 되던 즈음, 복직 날짜가 다가왔다. 다시 일하려니 숙박이 많은 스케줄이 부담됐다. 한 달에 많게는 열흘 가까이 집을 비울 때도 있는데, 엄마 껌딱지인 애를 맡기려니 막막했다. 복직, 이직 두 가지 경우의 수를 가지고 토익시험을 치고, 증명사진을 찍고, 체중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호텔 쪽에 지원서를 내니 나이 제한이 걸렸다. 겨우 입사 가능한가 싶으면 월급이 발목을 잡았다. 아이를 보는 도우미 이모에게 다 줘버리면 남는 건 제로. 다른 데라도 지원하겠다며 찾던 와중에 둘째가 찾아왔다. 다시 임신휴직에 들어가 4년을 쉬었다. 긴긴 고민 끝에 2016년, 퇴사를 결정했다.
2년 뒤, 외국계 기업 영업직으로 입사했다. 명품 브랜드에 입사하며 제2의 인생을 꿈꿨으나 현실과 타협하며 10개월 만에 다시 주부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어린이집, 유치원에 있는 텅 빈 집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그러나 그것도 딱 일주일. 어색하고 허전했다. 매일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허했다. 일단 움직이자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육아서를 펼쳤다. 프랑스, 독일, 핀란드, 미국 등 국적 상관없이 출간된 육아서를 읽었다. 나와 아이를 위한 책을 찾으면 읽고 또 읽고 블로그에 기록했다. 그리고 경험이 최고의 교육이라며 2018년, 2019년 세 차례에 걸쳐 한 달 살기를 위해 태국,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돌아와서도 계속 공부했다. 질문하는 아이로 키우고자 하브루타를 공부했고, 자격증 취득 후에도 교육학 및 심리학을 위한 스터디를 이어갔다. 거기서 만난 선생님들과 글쓰기 공부도 하며 공동저서를 출간했다. 마지막 같은 시작이 되어 제대로 된 글쓰기 공부에 몰입했다. 일주일에 많게는 4-5일씩 수업에 참여해서 쓰는 삶을 살고 있다. 작년까지 개인 저서 2권, 공동저서 4권을 출간하며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나오는 사람이 되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집에만 머물기 아까워 티 수업을 배웠다. 일주일에 한 번, 부산이나 울산까지 오가야 했지만 새로운 취미 활동을 갖고 싶었다. 티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건강을 생각하면 커피보단 낫지 않을까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 어쩌면 글쓰기보다, 여태 배워온 전공과 잘 어울리는 분야다.
이렇게 나는 작가이자 글쓰기 코치이자 티 전문가가 되었다. 여태 걸어온 길만 보면 급 핸들을 돌려 방향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하나 그 길을 길게 늘여보면 연관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아직도 한 번에 입이 안 떨어진다. 작가라고 하려니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도 아니고, 글쓰기 코치라고 하려니 직업군이 생소한 것 같고, 티 전문가라고 하려니 장인급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부라고 하려니, 그것도 애매하다. 망설이고 있으면 옆에 있던 아들이 말한다. "우리 엄마 작가예요. 티 선생님이에요!"
어찌어찌 흘러온 지금의 자리. 가끔, 마음속 먼발치에서 보면 나도 내가 낯설다. 그렇지만 여기에 나를 맞춰야지. 진짜 내 자리가 되게, 내 옷이 되게, 내 페르소나가 되게.
우리의 인생은 직선이 아니다. 물결치는 강물과 같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도전을 경험한다. 앞으로도 어떠한 도전과 성장의 기회를 만나게 될까.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설레는 지금이 아닐까.
도전하는 엄마는 아름답다. 그리고 도전을 향하는 과정은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