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에서 깨달음으로
2024년 봄. 별다른 계획이나 목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친구가 온라인에서 하는 타로 수업을 듣자고 했다. 비대면 강의를 통해 얼마만큼 배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게 아니었기에 듣기로 했다. 20분짜리 수업 스무 강의를 듣는 커리큘럼이었다. 온라인으로 하는 수업이지만 실습을 위해 타로 카드가 있어야 했다. 이왕 시작하는 거 제대로 갖추자며 인터넷에서 유니버셜 정품 타로와 스프레드 담요를 주문했다. 수업자료까지 출력 완료. 메이저 카드와 마이너 카드를 읽고 해석하는 방식을 배웠다. 다른 사람이 해석하는 걸 듣기만 했는데,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철학관에 가거나, 타로점 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제는 안 가도 되겠다 싶기도 했다. 타로점 치는 사람처럼 수시로 카드를 섞고, 배열하고, 뽑는 연습도 했다. 잊어버리지 않으려 꼼꼼하게 메모하고 같은 강의를 두 번 이상 듣기도 했다.
강의 후반에 가까워질 때쯤,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최고의 종교는 공부예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주역, 사주, 타로를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바라고 했다. 겉으론 평온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저마다 가슴 아픈 이야기와 굴곡이 있다고.
"잘 된다고 해서 호들갑 떨어도 안되고, 잘되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도 없어요. 인생 곡선을 그려 평균 지점을 연결하면 다들 비슷해요. 왜 나만 이렇게 힘든가 자책할 필요 없어요." 공부하고, 사람 만나면서 절로 겸손하고 숙연해졌다고 덧붙이며 최고의 종교는 공부라는 말을 재차 강조했다. 그 말이 어찌나 강하게 남는지. 수업이 끝나고 6개월이나 지났음에도, '최고의 공부는 종교'라는 말이 강하게 남았다.
왜 이토록 이 말에 꽂힌 걸까. 현재는 책 읽고 글 쓰고 배우며 살아가지만 몇 년 전 나는 그렇지 않았다. 책이랑은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의존하는 정보는 다른 사람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이었다. 거짓 뉴스도 사실처럼 믿고 쉽게 속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거나 알아보려는 시도는 아예 하지 않았다.
말도 그랬다. 내가 쓰는 단어가 내가 사는 세상이라는데 그땐 매일 쓰는 말이 한정적이었다. 아이들을 키운다는 핑계로 동요만 듣고,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대화만 했다. 동네 엄마들과 대화를 나눠도 대화 속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관심사도 달랐다. 나와 내 가족에게 관심을 주기보다는 다른 가족이나 아이들에게 관심을 줬다. 어떻게 하면 저 집 아이들처럼 키울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좋은 기관에 보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일하지 않고도 여유롭게 살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자기 계발을 시작하며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육아서를 시작으로 다른 분야 책을 읽고, 더 알고 싶은 것이 생기면 찾아보고 공부해 나갔다. 배울수록 무지하게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만 오래 자책하진 않았다. 책을 통해 동기부여를 받고, 배워야 하는 이유를 찾으며 자극받았으니까. 이토록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마다 배우는 활동에 매진했다.
책을 읽든 공부를 하든 뭐라도 하다 보면 자연스레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게 된다. 만남이 이어지면 정기적인 모임이 만들어진다. 독서모임에 가면 나보다 책을 많이 읽고, 박학다식하고, 재능 부자인 이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서 여태 나는 뭐 하고 살았나 속으로 자책하기도 했다.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서라도 공부를 지속했다. 전과 달리 궁금한 것은 직접 찾아보고 검토하며 나름의 필터로 걸러냈다.
한때는 내 삶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것도, 공부를 잘한 것도,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것도 아니다. 꿈에 그리던 직장에 다닌 것도, 이상적으로 꿈꾸던 남편을 만난 것도, 애교 넘치는 자식을 키우는 것도 아니다. 순탄치 않은 하루를 보낼 때면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건가, 뭘 그토록 잘못했을까 괴로웠다. 그러다가 작가가 되며 다른 작가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몇몇 분의 스토리를 들을 때면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내일도 아닌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어떻게 저런 삶을 살아냈을까,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어떻게 버텼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지금 내 어깨에 있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숙연해졌다. 유명한 사람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도 아닌데 대단해 보였다. 나는 못했을 것 같은 삶을 살아낸 걸로도 존경스러웠다. 신이 있다면 저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올해는 자기 계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었다. 글의 트렌드가 바뀐 건지, 대다수의 작가들의 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수가 스토리텔링으로 글을 시작했다. 절망적이고, 힘들었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을 공유했다. 작가가 실제 겪은 이야기를 보여주듯 적어낸 글을 읽다 보면 단편 영화 한 편 보듯 절로 빠져들었다. 어떤 고비를 만나, 어떤 노력과 실행을 했으며, 어떤 결과를 이뤘는지에 대한 스토리를 읽으며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교회도 잘 가고 절에도 잘 간다. 철학관, 타로, 점집도 마찬가지. 가는 이유는 비슷하다. 지금 잘하고 있다고,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잘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다. 스스로 정한 답을 듣기 위해 가는 거나 다름없다.
공부를 하며 다른 사람들이 인생을 대하는 과정을 본다. 그들이 살아온 날을 보며, 지금처럼 꾸준히만 해나간다면 나도 언젠가는 잘 될 거란 믿음이 생긴다. 책을 읽을수록, 공부할수록 그 확신은 유채색으로 변한다. 믿음, 희망, 확신이 강렬해지는 것만 봐도 최고의 종교는 공부라는 말을 반박할 수 없다. 스스로 정한 답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이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