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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믈리연 Nov 12. 2024

마흔셋,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어른이라는 무게

일요일 저녁, 식탁에서 숙제하던 둘째가 말했다. 

"엄마는 어른이니까 다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고력 수학 학원 숙제는, 수포자인 나에게 수시로 도전장을 던진다.

"당연히 알지. 정확히 말하면 알았지. 근데 지금은 필요하지 않아서 공부 안 하니까 다 잊어버린 거지."


변명 같았다. 묘했다. 5학년인 첫째 아이 수학 문제를 볼 땐 더 자주 막힌다. 언뜻 보면 쉽게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안된다. 공식이 기억 안 나는 건 물론이고, 숫자와 점점 멀어지고 싶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게임, 노래도 모른다. "너네는 그런 걸 왜 좋아해?"라고 묻는 시대에 뒤떨어진 엄마가 되고 있다.


마흔셋. 법적으로는 어른이고 중년에 입장할 나이다. 마음은 여전히 스물일곱, 사회생활로 한창 바쁠 때에 머물러있는데. 아이들이 학교 가고 나면 나도 놀고 싶다. 넷플릭스로 보고 싶고, 달콤한 과자도 먹고 싶다. 요플레도 먹고 싶고, 요구르트도 사 먹고 싶고, 아이스크림콘 먹으면서 길을 걷고 싶다. 좋아하는 새콤달콤, 마이쮸 젤리도 먹고 싶고, 쫀득이도 손으로 찢어가며 우물우물 씹고 싶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라며 스스로 통제하고, 적당히 달콤한 간식이 있으면 아이들에게 양보해야 어른이라 생각했다.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를 떠올려본다. '이제 정말 어른이구나.' 하는 마음에 억지로 등을 곧게 폈다. 아이들 앞에서는 실수하면 안 된다고, 어른답게 현명하고 이성적이야 하는 줄 알았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그랬다. 발 빠르게 정보를 입수해야 하고, 내 아이에게 맞는 곳을 실패를 최소화하며 찾아야 하는 줄 알았다.


아이의 실패가 가르쳐 준 것

올해 초. 둘째 아이가 바둑대회를 나갔다. 전년도에는 우승을 했던 아이가, 예선에서 탈락했다. 당연히 예선을 통화하고 본선에 올라가겠거니 하고 집에서 느긋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부랴부랴 경기장에 도착했다. 울먹이며 전화하던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화장실 앞에 기다렸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 큰 소리로 세상 가장 못생긴 표정으로 우는 아이를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안아줬다. 열 살 인생 가장 큰 실패와 시련을 경험한 아이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엄청 큰 공부를, 의도치 않게 하고 말았다.

집으로 가는 길, 고사리 같은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훔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목으로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오늘 힘들었지? 당연히 우승이나 준우승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놀라기도 했을 거야. 그런데 매번 이길 수 없고, 잘할 수 없어. 1등보다 더 어려운 게 그걸 유지하는 거야. 잘하고 싶은 애들이 얼마나 많겠어? 그 친구들은 몇 배 더 많은 시간을 노력하고 연습할 거야. 엄마도 그랬던 적 있어. 못할 때도 많았고, 떨어질 때도 있었어. 그런데 이 과정이 꼭 필요해. 오늘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너도 내일부터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실은, 아이가 당연히 우승할 거라 생각한 나도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일은 분명 아이와 나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가 아니었을까.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뭐가 잘못됐는지 분석하고 반영하기. 내가 만일 아이였다면 한없이 떼쓰고, 강자로 구성된 팀을 만난 걸 탓하고, 어수선한 경기장 환경을 탓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른이니까, 내 아이 엄마이니까 조금 더 이성적으로 현명하게 판단하려 했다.


불혹(不惑)에서 지천명(知天命)으로 가는 길

마흔이 넘어서 깨달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완벽한 어른이 아니라는 걸. 내 안에 아직 어린이가 있지만, 그 자아를 꺼내지 않고 성숙한 어른처럼 포장하고 있다는 걸.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하고, 생각한다는 걸. 


며칠 전, 둘째가 물었다.

"엄마, 어른이 되면 뭐가 좋아?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어른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만 지낼 수 있어?"

"너는 어때? 초등학생으로 사니까 뭐가 좋아? 그리고 안 좋은 건 뭐야?"

"다 좋지. 근데 한 가지 안 좋은 건 있어. 공부하고, 숙제하는 거."

"어른도 그래. 어른이 되면 좋은 거 많지. 그런데 어른도 어른만이 가지는 힘든 일이 있어.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아픈 날에도 일하러 나가야 하고, 집안을 돌봐야 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하기 싫어도 공부해야 하고 그래."


고개만 끄덕이는 아이를 보며, 내 안에 숨은 아이도 같이 웃었다. 어쩌면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건, 내 안의 아이를 완전히 지우는 게 아니라 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으로 가는 이 길 위에서,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성장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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