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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코리아 타임

by 소믈리연
ChatGPT Image 2025년 8월 8일 오후 12_07_39.png

"이젠 코리아 타임이란 말이 없어진 거 같죠?"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관계자분이 한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랬다. 모두 약속 시간 10분 전에 와있었다. 예정된 결석 자만 있었을 뿐.

몇 년 전만 해도 약속 시간에 늦는 건 으레 정당한 일이었다. 오전 8시에 모이든, 오후 8시에 모이든 10분에서 30분 정도 늦는 건 기본이었다. "길이 막혀서", "버스가 늦어서", "지하철을 놓쳐서"등 사지 선다형 변명 모두 통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약속 시간을 칼 주름처럼 지켰다. 예약 시스템에 익숙해진 건가. 제시간에 도착했다. 5분만 늦어도 미안하다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수업을 시작하는 강사.

나도 전에는 그랬다. 항상 늦게 나섰다. 오후 5시 약속이면 10분 정도 늦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5시 30분까지만 가면 돼. 어차피 다들 늦을 거거든."이런 말을 해가며. 늦게 도착해서는 늘 그랬든 버스, 도로 상황을 핑계 삼았다.

그러던 내가 서서히 변했다. KTX 승무원으로 일하면서부터였다. 기차는 지각하는 이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정시 출발이 생명이다. 닫히는 문을 향해 고속 열차보다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오는 승객을 보고 있으면서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천년을 버틴 바위보다 무거운 문은 차갑고도 냉정하게, 묵직하면서도 웅장한 소리와 신호를 내며 닫혔다. 10년 동안, 숱하게 봐왔던 장면. 천천히 속도를 내는 기차 문을 하염없이 두드리는 승객과 눈이 마주칠 때면 죄송하지만 나도 같이 냉정해져 갔다.

강사로 활동하면서 출강을 자주 나간다. 대구가 아닌 지방에도 자주 자 간다. 한두 시간 거리에 있는 강의장에 가야 하는 날이면 보통 두세 시간 전에 출발한다. 교통상황을 알 수 없으니. 혹여 도로에 사고라도 나면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일찍 도착하면 근처 카페에 간다. 그 지역에서 잘 알려진 곳이나, 내가 찾는 감성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 책 읽고, 일정 정리하고, 강의 자료를 훑어보면 마음도 차분해진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 급하게 뛰어가서 숨을 헐떡이며 시작하는 수업, 미리 기기 점검하고 수강생들을 맞을 준비를 하며 시작하는 건 확연히 다르다. 시작 때 가진 템포가 끝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진 에너지가 다른 것도 그렇고.

'코리아 타임'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낯설었다. 마치 잊고 살았던 친구를 소환하는 느낌이랄까. 이 말이 사라진 건, 사라지고 있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다는 증거다. 시간을 지키는 건 단순히 늦지 않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배려이며,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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