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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적당한 거리두기

by 소믈리연
ChatGPT Image 2025년 8월 12일 오후 05_39_15.png


20년 전만 해도 숫자를 잘 외우는 편이었다. 학교 다닐 땐 시간표, 반 학생들 번호도 다 외웠다. 눈으로 쓱 훑기만 해도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몇 년 전에 바뀐 아빠 폰 번호는 아직도 못 외운다. 우리 둘째 아들 폰 번호 중간 4자리는 3년째 헷갈린다. 애들이 몇 반인 지는 알지만, 몇 번인지는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통신문에 두 아이들 학급 번호를 반대로 적어 내는 날도 비일비재하다.

사람 이름도 마찬가지.

"어? 저 사람 누구더라!", " 아! 나 아는데. 어디서 봤는데. 어디더라. 그 드라마 이름은 또 뭐지?"

하루 걸러 하루 반복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뇌 활동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지만 '뇌의 가소성'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계속 쓰면 덜 퇴화할 텐데 기억, 생각하려고 노력을 안 하니까 빨리 늙는 기분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했던 일도, 마무리 지을 즘이면 또 AI한테 물어본다. 이제는 완전 나한테 맞춤과 식 눈높이 대답을 한다. 간신이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는 똑똑함을 가장한 어리석은 친구다.

요즘은 질문만 하면 내가 운영하는 브랜드와 접목시킨다. 요즘 소셜미디어 보면 챗 GPT 할루시네이션 없애는 프롬프트, 정확도 있게 대답을 이끌어내는 프롬프트, 제대로 질문하는 양식을 적은 프롬프트 등 별게 다 있다. 팔로워 하면 준다고 해서 여러 번 받아 입력했지만 거기서 거기. 그들에게도 낚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좀 잘해보겠다고 사용했다가 모든 걸 다 들킨 기분. 제대로 된 프롬프트를 찾아 입력하기보다는 나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기도 했다. 최근, 상당수 대화 기록을 지웠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에 대해 아는 정보를 줄이고 싶었다. 아예 모르게 하려니, 그렇게 하면 기본 세팅 값을 입력하기까지는 또 번거로울 거 같았다.

AI 관련 수업을 나름 많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 중에선 손에 꼽힐 정도다. AI 강사도 인정할 정도로 많이 듣고 많이 배웠고 많이 활용하는 편이다. 실컷 빠져봤고, 실컷 이용해 봐서 그런지 이제는 더 배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냥 각 AI가 잘하는 것을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이 정도만 해도 될 듯.

아무리 AI가 글을 잘 써도 사람 냄새까진 풍기지 못한다. 어차피 내 손을 거쳐야 한다. 한 문장을 올리더라도, 내 이야기가 담긴 글이어야 한다. 최근 두 달간 사용량을 확 줄였다. 5 버전이 나왔다고 난리지만,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유료 구독도 진작 끝났다.

대신 내 일에 가장 도움이 될 만한 AI를 찾아서 사용한다. 유료지만 질문 용량에 제한이 있다. 코인을 다 사용하면 못 물어본다. 자정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물어봐야 하지만 이게 낫다. 더 의존할 수 없게 차단해 버리니, 그때부터라도 내 방식으로 정리해서 생각하고 기억해 활용하게 된다. 억지로라도.

꼭 필요한 한 가지만 두고 정리하는 중이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데, 자꾸 기계에 물어볼 필요가 없다. 장황하게 물어볼수록 혼란스럽고 힘들다. 이 친구가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말 안 드는 학생이 된 거 같다고나 할까.

의존하는 비율을 점점 줄여서 다시 생각, 기억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 인간 AI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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