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어디에서도 한 적 없는
아주 솔직한 이야기다.
빼빼로를 잡고
도구 없이 최대한
절반에 가깝게 나눈다해도,
그것이 정확하게 절반일 확률은
제로에 수렴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체도 이러한데,
마음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눌 수 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하물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들'을 향한
마음이라면 더하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다 똑같은 강도로
아프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싫어하지도 않았으니...
그냥 관심이 없었다,
정도로 해두는 게 맞겠다.
그런 내가...
아이 한 명을 얻고자 찾아간
난임센터에서,
두 명의 아이를 만나게 되면서
운명처럼
'쌍둥이 엄마'가 되었다.
문제는, 두 아이를
동시에 케어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처하는 법을 몰랐다는 것.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
파워 J였던 나는
일의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육아 역시,
'급한' 순서대로, 혹은
'급해 보이는' 것 먼저
줄을 세워
처리하려고 했다.
문제는
항상 '급한' 쪽이
같다는데 있었다.
나의 딸들은 쌍둥이지만
외모로
이란성임을 강렬하게 주장하며
태어났고,
조리원에서부터
철저하게 다른 성격을
지녔음을 알려주었다.
첫째 고원이로 말할 것 같으면
36주 내내
후둥이 밑에 깔려 있으면서도
큰 태동도 없이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한
일등공신이다.
더 고마운 것은, 그렇게
단련(?)되어서인지,
나와서도
놀라운 참을성을 보여줬다는 것.
고원이는
배가 고파도, 똥을 싸도,
졸려도,
자지러지게 우는 법이 없었고,
까만 눈동자를 똥그랗게 뜨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
고이는 달랐다.
조금만 불편해도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데시벨로 나를 불러들였다.
'내 팔이 두 개 뿐인데 어떡해.'
라는 말로,
나는 나의 부족함을 감췄고
고이의 울음이 잦아들고나면
그때 고원이의 고충을 해결해주었다.
남편이 있는 날에도
난이도가 낮은
첫째 고원이를 남편이 케어하고,
둘째 고이는 내가 온전히
케어하는 시스템이었다.
분명 둘을 낳았는데,
내 품에 안겨있는 아기는
늘 하나였다.
둘 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임에는 틀림없지만,
고이에 비해
내 손이 덜 탄 고원이는
덜 아픈 손가락이 맞았다.
(이것을 고백하기까지
참 많은 고민을 했지만
쌍둥이 엄마들과 대화하며
어느정도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을 보고
적어보기로 했다.)
계란 때문에
엄마에게 날 선 말을 이어가던
그날 아침.
(이전화 참고)
내 터진 입을 막은 것은
아기들의 울음소리였다.
반사적으로 아기방으로 뛰어가
습관처럼,
고이를 안아올렸다.
고원이는...모르겠다.
늘 그랬듯이
눈만 똥그랗게 뜨고 있었겠지.
그러다 뭔가 여분의 인기척이
더 느껴졌는지, 고원이가
평소와 다르게
제법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손을 뻗어
고원이를 안았다.
고원이는 울음이 짧은 아기였다.
예방주사를 맞아도
앵~ 하고 바로 그치는 유니콘.
친정엄마의 어르는 말에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데시벨로 울어제끼던 고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