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날로 바로
사직서를 냈다.
사실 나 대신 낸
사직서나 다름 없었다.
엄마가 아니면,
내가 일을 관둬야 할
위기였으니까.
이 나라의 출산장려정책에는
큰 함정이 있다.
돈 100만원이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다.
돌봄에 대한 지원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한,
할머니들은 황혼육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조부모 돌봄 없이
아이를 키우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둘이 되거나
쌍둥이의 경우
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오죽하면, 난임병원에서
쌍둥이 임신확인서를 주시면서
"같이 돌봐주실 분은 있어요?"라고
물어봤겠는가.
내 딸이,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로 그 마음...
내 딸이 직업을 잃으면
남편 앞에서 당당하지 못할까봐,
자기 옷 하나 사입는걸
부담스러워 할까봐.
말로도, 글로도
다 담을 수 없는 마음에 기대어
우리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이 나라는, 할머니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진심이다.
나의 생업이고, 보루이고,
꿈이라 해도
자식 앞에서는
다 놓을 수 있는 것이
엄마라는 존재다.
엄마는
어차피 허리도 아팠고
언제까지 할까 싶었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이어진 시어머니와의 대화.
어머니는 섭섭한 눈치셨지만
이내 받아들이셨다.
"어머님, 아무래도
저희 엄마가 와서 봐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아버님도 혼자 계시고..."
"사돈은 괜찮으시대?"
"네. 어차피 허리아파서
그만둘까 고민하고 계셨대요."
"아파서는 무슨.
딸 생각해서 오시는거지.
잘해드려라. 섭섭하게 하지말고."
"네."
잘해드리겠다는 말,
섭섭하게 하지 않겠다는 말,
애들 돌 때까지만 봐주면 된다는 말.
주말엔 반드시 집에 가서
쉬게 해주겠다는 말.
이 정도면, 사기다.
그것도 아주 악질 사기.
어쨌든, 엄마는
퇴사를 앞두고
모아둔 적금을 헐어
비장하게 소형 SUV를 샀다.
경기 남부의 엄마 집에서
서울을 오가려면
경차로는 다소 불안하셨던 모양.
여기에 몇백만원을 보태주면서
나는 얼마나 생색을 냈던가.
(사실 이 차는 우리 둥이들의
나들이 수단으로
충실하게 쓰였다. 거의 내 차...)
엄마가 친구 분들께
이런 사정이 있어
딸네 집에 애기를 봐주러
가야할 것 같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반대하는 분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 걔가 어떤 딸인데."
"걔가 어떻게 했는데."
이런 말들이 엄마에게는
용기와 동시에
의무처럼 느껴졌을까.
엄마는 그동안
나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우리 집에 왔다고 했다.
23년 5월의 어느 날.
새벽 5시.
삑- 삐빅-
(삐용삐용)
삑-
삑 -
삑-
삑-
삑.
(띠리리링)
몇 번의 시도 끝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엄마와
장바구니 두 개,
커다란 호박이었다.
"엄마, 깜짝 놀랐잖아.
왜 이렇게 새벽같이 왔어?"
아직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새벽,
우리는 그렇게
육아라는 전쟁터로
함께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