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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Apr 17. 2020

명란과 야망을 품어라, 명란마요 유부초밥

04/15 풀밭 위의 점심식사

부산 삽니다. 인구의 30%가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인과 바다' 뿐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가 좋아서 직장을 옮겼습니다. 동네 친구랑 마실 하기 좋은 곳을 돌아다닙니다. 가끔 제 첫 자동차로 드라이브해서요(꺄).




기나긴 임금 협상이 마침내 타결되어 금년 연봉 인상률이 결정되었다. 기획팀 근무 중 좋은 점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정보를 가장 빨리 받는다는 점. 동기들과 선배들이 오매불망 내 상태 알림에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조금쯤 여유와 왜 때문인지 모를 우월감을 만끽하며 사내 메신저를 열었다. 물가 대비 높지 않았지만 전년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경기를 감안하면 동결되지 않은 점은 다행이었다(며 정신 승리).


 그러나 막상 계산기를 두드려 지난해 연봉에 인상률을 더하면 노동 시장에서 내 청춘의 가치가 1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환산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40대 조기 은퇴를 목표로 급여의 50% 가까이 적금 넣는데 이 정도 인상률로는 조기 은퇴는커녕 30년 장기근속자가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지난해 우수 사원으로 선정되었음에도 팀 내 진급자 대우 차원에서 그에 못 미치는 인사 고과를 받은 점을 감안하면 회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재테크 안내서를 보면 차도 사지 말고, 커피도 마시지 말고 허리띠를 졸라매어 70%까지 저금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4월 15일은 지방선거가 있는 날이었고 1번을 찍어도, 2번을 찍어도 풀리지 않을 답답함에 집 앞 벤치에서 점심이나 한 끼 하기로 했다. 월급 전 주인만큼 가성비와 가심비를 챙기는 메뉴가 좋겠다. 설날에 선물 받아 아직 남아있는 명란젓으로 명란 마요 유부초밥을, 1200원짜리 캔 옥수수로 콘치즈를 만들어 가기로.



. 명란 마요 유부초밥


▷ (2인분) 명란젓 1 덩이, 유부주머니 2인분, 초밥용 식초, 초밥용 조미료, 마요네즈 3큰술, 쪽파 1줄기


1. 명란젓 가운데 칼집을 내어 껍질과 알을 분리한 뒤, 마요네즈, 채 썬 쪽파를 버무리기

2. 따뜻한 쌀밥에 명란젓과 초밥용 식초, 조미료를 뿌리고 골고루 비비기

3. 유부주머니를 꾹 눌러 물기를 빼낸 뒤, 입을 벌려 준비한 쌀 밥을 담기






+ 마늘 듬뿍 콘치즈 보너스 영상


- 은채 씨,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적금 넣지 말고 자기한테 돈을 써.


 삼 남매를 내리 낳고도 출산 휴가 한번 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옆 팀 차장이 어느 날 나를 붙잡아 놓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 어차피 모아봤자 결혼하고, 애 낳고, 애 낳아서 아프면 병원 가서 다 쓰게 될 돈이거든. 그러니 지금 자기 머리하고 마사지받는데 돈을 써. 솔직히 다 써도 돼. 회사는 계속 다닐 거잖아?


 서점에 진열된 재테크 안내서는 모두 저축하라고 난리인데, 월세 말고 전세를 찾으라고, 통장을 열개씩 쪼개서 투자하고 저금하고 청약 준비하고 신혼부부 특공을 노리라는데. 이런 저축 포르노의 이면에는 ‘언젠가 회사에서 잘린다면’, ‘만약 결혼해서 일을 그만둔다면’이라는 방어적 자세가 느껴지기 마련. 15년 직장 선배처럼 ’다 써. 남김없이 청춘을 위해 한 푼도 아끼지 마!’ 같은 말을 했다가는 먼 훗날 으슥한 골목에서 독자에게 짱돌을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일까.

 

 적금 목표액을 더 높일지, 더 나은 연봉을 제시하는 일자리를 찾아볼지 고민을 토로하는데 함께 한 연이가 도시락을 먹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언니는 정말 생각이 깊네요. 전 그런 거 모르겠어요. 그냥 나한테 잘 맞고 재밌는 일이니까 계속할 뿐이에요.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주인공으로 이름난 한국계 배우 산드라 오를 인터뷰하던 백지연도 비슷한 대답을 들었다.

- 할리우드에서 여배우가 동등한 역할의 남자 배우보다 출연료를 더 적게 받는 게 사실인가요?

- 네? 그럼요. 훨씬 못 미치지요.

- 그럼 당신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 음… 계속 일해요. 저는 그냥 계속 일하는 걸 멈추지 않아요.



 연봉 인상률과 저축액을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집에서 손가락 빨고 노는 것만이 답일 터. 그래서 나는 얼마나 벌기보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려고 한다. 지금 하는 일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력을 얻는데 도전하는 것, 작지만 수입원이 될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것. 소속된 회사 내 고과나 인지도보다 업계에서 평가받는 것. 30대 전후의 여자들은 커리어 개발이 어렵다는 심술궂은 미신은 무시하고 계속 일하기를 멈추지 말 것.




집 앞 벤치 어딘가 at the Table

. 연(27, 사내 식당 점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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