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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Apr 25. 2020

훌륭한 사람 말고, 아무나 만드는
참치 샌드위치

04/18 풀밭 위의 점심식사, APEC 나루공원

부산 삽니다. 인구의 30%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인과 바다' 뿐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가 좋아서 직장을 옮겼습니다. 동네 친구랑 마실 하기 좋은 곳을 돌아다니고 소개합니다. 가끔   자동차로 드라이브해서요().



 

내가 급하게 뒷 범퍼를 탕탕 두들겨 봤지만 이미 친구의 차는 유유히 중앙분리봉을 긁고 지나간 뒤였다. 앞뒤로 꽉 막힌 주차장을 벗어나려고 차에서 내려 후진 공간을 봐주던 찰나의 일이었다. 안에는 나 말고도 4명의 친구가 더 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긁힌 뒷 범퍼를 보고 쿨하게 웃을 수 없었다. 그저 좌우로 누가 있나 확인 한 뒤, 조용히 뿌리 뽑힌 중앙분리봉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흙을 토닥토닥 덮어두는 수밖에.


 사건의 시작은 지난주 내가 친구 발렌시아가(애칭)를 졸라 기장에 놀러 가자고 한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을 불러 기장 앞바다에서 도시락을 까고 맥주 한 잔 하면 어떨까? 도로주행 시험에서 3번 연속 불합격하면서 면허를 향한 투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동기 부여도 될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도 모처럼 의기투합해 토요일 약속을 잡았다. 발렌시아가는 운전 3년 차 초보라며 사고 나도 모른다, 하며 경고했지만 머릿속엔 이미 친구들과 음악을 들으며 동해가 훤히 보이는 장산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뮤직비디오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부산 인파가 다 기장으로 빠져나가기라도 할 기세로 막히는 바람에 결국 APEC 나루공원으로 목적지를 바꿔야 했다. 그 와중에 발렌시아가의 차가 긁혔다. 그 와중에 다른 친구 써니는 불꽃같은 성격의 여자 친구에게 왜 주말을 함께 할 수 없는지 해명해야 했다. 그 와중에 진이는 유행성 폐렴으로 미뤄지던 출근을 겨우 시작했다고 한다. 또 그 와중에 막내는 지난번 일하던 회사에서 마지막 달 임금을 주지 않아서 고용노동부에 신고했다고 털어놨다.


 사람들은 청춘이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며 원하는 건 다 될 수 있으니 낭비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펄떡이는 생선을 품에 안고 있는 초짜 요리사처럼, 얻다 써먹을지는 좀체 모르겠는 거다. 스무 살이라는 것, 특히 스물일곱, 여덟, 아홉이란 것은 왜 아직 이렇게 엉망진창일까?


싱싱한 생선은 몰라도 부엌에 굴러다니는 참치 통조림 써먹는 법은 안다. 참치 굴소스 샌드위치를 만드는 거다.


참치 굴소스 샌드위치

물기와 기름기를 짜 낸 참치 캔 1개

양파 1/4개

마요네즈 1.5큰술 + 굴소스 1작은술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


1.  양파를 잘게 다진 뒤 소금 한 꼬집을 섞어 5분간 둔 뒤, 행주에 건져 물기를 제거한 뒤 참치와 합친다.

 
2. 마요네즈, 향이 좋은 올리브 오일, 소금과 후추 약간, 굴소스를 취향에 맞게 조금씩 넣고 싹싹 개어 섞는다.

3. 식빵에 버터를 바른 뒤, 참치 속을 얹고 나머지 식빵을 덮은 뒤 프라이팬이나 토스터에 구워 완성.



치매나 알츠하이머에 걸린 환자도 어린 시절 혹은 처녀, 총각적 있었던 일들은 또렷이 기억한다. 반복적 경험과 학습으로 장기 기억으로 신경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즉 오늘 겪었던 사건은 (운이 좋든 나쁘든) 남은 70년 동안 다시 떠올리게 될 이야기다.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누구의 상태가 더 나쁜지 대결했는데, 승자는 단연 진이었다. 고장 난 싱크대를 고칠 돈으로 홧김에 명품백을 샀다는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가방은 들고 다니지만 싱크대는 못 들고 다니잖아요’. 우리가 실패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루저는 아닐 것이다. 지금 겪은 일련의 비극에는 드라마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남은 70년간 언제 다시 읽어도 질리지 않을.



  같은 맥락에서 스무 살이니까 뭐든 될 수 있다는 말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누구나 빌 게이츠나 수지처럼 될 수 없는 것은 우리 사회 부조리 탓이라고 한다. 흙수저, 기울어진 운동장, 재능이나 운 때문이라고. 그러나 내가 수지가 될 수 없는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단지 내가 수지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은가? 하얀 피부와 늘씬한 몸매가 부럽기는 하지만 난 그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스무 살의 특권은 노력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이 아니다. 스스로 그 성공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용기, 야망을 스스로 설계할 자유에 있다.


즉 신선한 참치살이 아니라 통조림이어도 내가 맛있다면, 친구들이 좋아한다면 난 그걸 오늘 레시피에 적겠다는 말이다.




At APEC 나루공원

센텀시티역 12번 출구에서 838m

매일 00:00 - 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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