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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Oct 30. 2020

부스러기를 얻어먹은 건 식사에 초대받은 게 아닙니다

삼색 소보로동, 누가 부스러기를 내었는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지난 9월 나는 신의 직장을 꿈꾸고 회사를 옮겼다. 입사 첫 주, 신의 직장은 나에게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제목은 HY헤드라인 크기는 14p, 본문은 휴먼명조 13p. 내가 신이라면 마더 퍼킹 휴먼명조는 쓰지 않겠다. 당직이라는 시간을 달리는 제도도 있었다. 공휴일에 출근해 9시간 근무하고 6만 원을 주었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사수는 태연했다. ‘추석 연휴에 나오라고 안 하는 게 어디냐?’


 어디냐고? 고인물이다 이 자식아.





‘바깥이 시베리아인데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게 어디야…’

‘부산에서 이만한 업무 강도에 이 정도 연봉이면 어디야…’


지난 글에서 강인한 멘털과 작은 일에 감사하는 자세를 갖자고 부르짖은 바 있다. 그러나 자기 합리화와 감사하는 자세를 헷갈리면 안 되지. 창업을 위해 퇴사를 고민하는 선배에게 위한답시고 내가 했던 말처럼. 그러고 보면 요즘 마치 요가 수행의 한 단계인 듯 해시태그에 #감사하기가 많이 보인다. 그러나 정신 바짝 차리시라.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것은 식사에 초대받은 게 아니니까.


 나와 같이 부스러기에 만족하지 않는 두 명의 친구를 초대했다. 저녁식사 메뉴는 보슬보슬 삼색 소보로동.



3가지 재료로 만드는 보슬보슬 소보로동

.(1인분) 다진 소고기 150g, 계란 2개, 부추, 간장, 설탕, 소금, 마늘


1. 부추를 잘게 썰고, 마늘 다져두기

2. 프라이팬에 다진 소고기를 잘게 부숴가며 익힌 뒤 마늘, 간장과 설탕 1 숟갈씩 넣고 소금을 약간 쳐 간하기

3. 볶은 소고기를 옮겨두고,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약간만 두른 뒤 계란을 깨어 저어가며 스크램블 만들기

4. 밥 뒤에 소고기, 계란, 부추를 삼등분에 올리기


Tip. 초생강이 있다면 얇게 펴서 돌돌 말아 올리기






 내 잘못이었다. 스스로 취향에 귀 기울이기보다 잘 나가는 동기 중 한 명이 되고 싶었던 바. 학과 사무실 졸업자 취업 현황에 이름이 오르는 선배처럼. 사실 그들도 전표를 치거나 새 차바퀴가 마르고 닳도록 외근을 다닐 텐데. 맥주에 나른하게 취한 은이 언니는 허공에다 삿대질을 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봤자, 대기업 월급쟁이야!’ 실로 술의 신 바쿠스(Bacchus)가 재림한 듯했다.


 귀 밑까지 길렀던 긴 머리를 깔끔하게 치고 온 훈이 오빠는 시큰둥했다. ‘다시 취업하는 거 별로 안 어렵던데?’ 오빠는 대기업 전자제품  영업팀에서 3년을 일하다 집에도 회사에서도 겉도는 선임 과장을 보며 퇴사를 결심했다. 1년 간 더 일하며 돈을 모은 뒤 퇴사했다. 그리고 아일랜드로 가서 정확히 8천만 원을 쓰고 놀았다(유학이었음을 강조). 돌아와 영어학원을 다니며 1년을 더 놀았고(취업 과정이었음을 거듭 강조) 우리와 만났다. 가을이 오기 전 서핑을 가자던 그는 돌연 재취업을 결심하고 정확히 2달 뒤 명품 회사 영업팀에 입사했다.


 언제가 퇴사하기 가장 좋은 나이예요? 내가 묻자 오빠는 해가 지는 창을 등지고는 시선을 약간 멀리 던졌다. ‘네가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스탠퍼드 대학의 Kristin Laurin 심리학 교수의 실험에 따르면, 탈출이 어렵다고 판단하면 사람은 소속 집단의 부조리함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정당화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소확행에 만족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체제 유지는 쉬워진다. 즉 ‘이 시국에…’하는 걱정에 몸 사릴수록 이 빌어먹을 회사 생활에 만족하는 셈. 그러나 정말 바깥은 시베리아일까? 그건 나가봐야 알 일이다.


 즉 내가 있는 자리에 만족하기 전에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알자. 내부 규정이나 엄마 친구 아들과는 상관없이 내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다. 또 언제든 떠날 수 있음을 기억하시라. 스스로 영혼이 자유라는 사실을 알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임원과의 점심 식사에서 조용히 말하시라. 싫어요. 안돼요! 물론 이사는 그대의 말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그 테이블에 있었던 동료들은 그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 소리를 모아서 스스로를 식사에 초대하시라.


싫다면 그만두던지. 나를 대신할 사람은 노량진에도 많이 있으니까 뒷일은 걱정 마시고.



at the Table

. 훈(양양에 놀러 가고픈 서른 다섯 짤)

. 은(회사를 그만두고픈 서른 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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