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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Aug 23. 2020

새댁 부엌은 엉망으로 만들어야 제맛

치킨 라따뚜이로 아모르파티


 귀여운 외모와 새침한 말투로 성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뭇 남자애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 옆에서 늘 들러리였고. 어느덧 20년이 흐른 지난해 겨울, 나는 창원의 한 웨딩홀 단상 위에서 성이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고 이번에는 진짜 들러리였다. 초중학교 동창이자 현역 절친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졸업도, 취업도, 차를 몰기 시작한 것도 1등이었던 성이는 기어코 시집까지 제일 먼저 가고 말았다. 나와 또 다른 절친이자 동창 진이는 뒤에서 어리둥절하며 수발을 들 수밖에.


 6개월이 지난 지금. 현관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성이는 도어록을 달깍 잠갔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이 이 집 밖으로 나가게 될 일은 없을 거라는 듯. 내가 있는 이곳은 천안의 한 고급 아파트였고, 진이와 나는 결혼 후 남편 직장을 따라 천안에 살기 시작한 그를 보러 휴가를 내고 충남까지 올라온 길이었다. 그나저나 천안이라니. 우리 셋은 부산·경남 밖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었다.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서울에서 일했던 잠깐을 빼고. 나는 결혼의 이런 점이 싫었다. 인생을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모셔다 놓는 점이.


 그러나 성이의 새 집, 하얗고 넓은 ㄷ자 부엌과 그 앞으로 탁 트인 창을 통해 천안 밀밭이 눈에 들어왔다. 북유럽 감성 브랜드 SMEG 커피 머신이 구석을 차지하고 갓 볶은 고소한 커피콩 냄새가 솔솔 풍기는 나만의 부엌이라니. 결혼도 제법 괜찮겠는데? 프라이팬, 냄비도 식기도 모두 새것인 지금이야말로 치킨 라따뚜이를 만들어 엉망으로 만들 때다.



. 간단한데 그럴싸한 치킨 라따뚜이

- 닭다리 4조각, 가지, 애호박, 토마토, 토마토소스(혹은 토마토 페이스트+물 1:1)


1. 닭다리살을 허브 솔트와 올리브유를 묻혀 20분간 염하기

2. 가지, 애호박을 먹기 좋은 크기로 깍둑 썰고, 토마토는 1/2등분 하기

3. 프라이팬에 가지, 애호박, 토마토 순으로 넣어 익히고 약불로 낮춰 토마토소스 붓기.
 *페이스트를 사용한다면 신 냄새가 날아갈 때까지 잘 버무린 뒤 물 1 숟갈 붓기.

4. 오븐을 180도에서 10분간 예열하고, 닭다리를 프라이팬에 살짝 익히기.

5. 내열 용기에 가지, 애호박과 소스를 부어 평평하게 만든 뒤 닭다리를 올리고 오븐에 굽기





‘자고 가. 남편 휴가 갔다.’

‘너는 어쩌고?’

‘이번 휴가는 따로 놀 거야.’


휴지를 꺼내려고 화장실 수납장을 열자 일회용 칫솔 한 팩이 기다렸다는 듯 준비되어 있었다. 집에 손님이 자주 와서 아예 한 뭉텅이 사놨단다. 손님용 방, 손님용 이불까지 있는 걸 보니 여기가 신혼집인지 에어비앤비인지 심히 헷갈렸다. 친구는 솔직히 같이 사는 남자가 아직 어색하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이렇게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들다니. 거슬리잖아?’ 이들도 부부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낯선 곳에서 둘만 사는 게 여간 심심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성이는 남편 몰래 귀하다는 복분자주까지 꺼내왔다. 완만한 곡선에 붉은색 원액이 진한 아름다운 술이었는데, 누가 봐도 훔쳐먹은 게 티가 날 만큼 잔뜩 따라주었다.


복분자만큼이나 얼굴들이 빨갛게 익고 있었다. 복분자가 몸에 좋다는 얘기를 꺼내자, 우리 중 하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너네 괄약근은 안녕들 하시냐?’ 지난해 치핵을 판정받았다고. 항문을 꼭 조이는 키겔운동을 몸소 실천해 보이고는 유연한 괄약근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에 질세라 다른 녀석이 위궤양과 탈모를 토로했다. 위궤양이라니, 그건 드라마에서 아들 혼자 키우는 엄마들이 걸리던 병이잖아. 낄낄거리는 나도 이미 지난달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아 엎드려 누워 있은 지 오래였다. 성이는 이어서 오메가 3와 프로폴리스의 효험을 거듭 강조했다. 탈모 고민에는 사뭇 진지하게 진단까지 내리는 것이다. ‘어성초가 답이야’.


아니. 내가 보기엔 복분자주가 답인 듯해.


남은 감자로 만든 크림 수프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탈모 증상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인생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라따뚜이와 복분자주에 이어 막창과 토스트를 후식으로 흡입하면서도 나는 다음날 있을 중요한 발표를 걱정하고 있었고. 이번 발표를 통해서 아직 내 인생은 내가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에도 친구들이 오락실 노래방을 갈 때 나는 겸연쩍게 빠져나와 수행 평가를 준비했다. 그때도 내 인생은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러나 아무리 수행평가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한들 다가오는 허리디스크와 위궤양을 막을 도리는 없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스피커를 통해 소녀시대 메들리가 흘러나오자 복분자와 음악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어쩌면 복분자와 어성초는 확실히 인생을 바꿀 수 있을지 몰라.


 베이비부머의 자녀 세대 중에서도 우리 92년생은 74만 명으로 1983년 이래 최다 인구수를 자랑한다. 부양할 어른은 많고, 번듯한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며, 그마저도 스마트폰과 전산화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는 데다 부동산 가격은 떨어질 줄을 모르는데. 허리디스크와 탈모에는 극심한 경쟁도 분명 한몫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오늘까지만 소녀시대 메들리에 춤을 출 것이다. 복분자주에 이어 새신랑이 숨겨둔 조니워커 블루라벨을 딸 것이다. 오늘까지만 신나게 놀고, 내일부터는 다시 다가오는 30대를 맞이하는 칼을 갈 것이다. 우리 92년생이 비록 지금은 시아버지 술상을 차리고, 잡다한 업무를 도맡거나 취업난에 허덕이지만 이로써 언젠가 성공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어쩌면 먼 훗날 ‘92년생 감사 면세의 해’나 ‘92년생 공로 상금’ 따위를 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땅의 92년생들이여. 시집을 가든 인적성 시험공부를 하든 엑셀 삽질을 하든 버티는 거다. 어성초와 복분자주는 물론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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