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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May 11. 2020

임대한 개츠비의 파티에는 마라 훠궈

05/03 온천천 테이블

 정신없이 떠드는 와중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급히 현관으로 뛰어갔다. 문 밖에 성이가 묵직한 크로스백을 메고 서 있었다. 몇 호인지 안 알려 줬는데 어떻게 찾았데? 묻자 커다란 인삼주를 가방에서 꺼내 탁자에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이 층에서 1210호가 제일 시끄럽던데요.




 어떠한 보답 없이 다 들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나에겐 한 명, 두 명… 조금 많이 있다. 요리동아리 후배들이 그렇다. 지난 주만 해도 한참 수습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싹싹한 정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 황금연휴에 뭐 해요… 요리하던 시절이 그리워요…!’


 그럼 나는 군말 없이 에어비앤비에 접속한다. 옵션은 주방이 있고, 모두의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깔끔한 독채. 호스트가 예약을 승인하면 곧장 답장하는 것이다. ‘집 빌려놨으니 와서 몸들 풀어'. 그리하여 동호회 동기, 후배 열명 남짓이 모이기로 한다. 황금연휴를 이용해 서울, 함안, 파주에서 일하는 옛 친구들도 온단다. 누군가는 직접 담근 인삼주를, 또 누군가는 직접 손질한 야채를 들고. 아빠는 집에서 20분 거리의 남의 집을 빌리는 게 이해가 안 된다며 한 마디 했다.


‘이건 뭐 위대한 게 아니라 임대한 개츠비 구만.’



.마라탕

▷ 쇠고기, 새우(선택), 마라샹궈 소스, 청양고추, 청경채, 숙주, 알배추, 새송이버섯, 대파


1. 대파는 잘게 썰고 나머지 야채는 입맛대로 썰기

2. 식용유로 달군 프라이팬에 대파를 먼저 볶고 쇠고기와 고추를 이어 볶기

3. 고기가 익으면 버섯, 알배추를 넣은 뒤 후추와 소금 간하기

4. 마라 소스를 푼 뭉근한 육수를 붓고 손질한 숙주, 청경채를 넣고 익혀 마무리



 임대한 개츠비의 파티 테이블에 올라올 메뉴는 마라탕과 마파두부. 여러 사람이 모일수록 전골 요리만 한 게 없다. 한 번 끓여 놓으면 몇 사람이고 우려먹을 수 있고, 입맛대로 재료를 넣으면 되는 데다 배도 부르고 해장도 된다니까. 마라탕은 만들기 간단한데 비해 그 향 때문에 평소 해 먹기 곤란한 메뉴기도 하고. 3인분짜리 시판 소스 하나면 몇 명이든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다.


 물론 돈 주고 남의 집을 빌려 파티를 여는 데 도리질을 치는 58년생 김 선생의 말씀도 이해는 된다. 아버지 세대가 이 악물고 벌어서 주택에 투자한 것도 남부럽지 않은 내 집에서 즐기는 여유를 꿈꿨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뭐든 공유하고 빌릴 수 있는 이 시대에 내 집 장만까지 기다릴 필요가 뭐란 말인가? 하고 싶은 건 많고, 임금인상률은 터무니없고, 가져도 금방 질릴 텐데.


 에어비앤비, 쏘카, 위워크‥ 소유 대신 경험을 추구하는 스트리밍 라이프야 말로 이 세기 최고의 발명품일 것이다. 어디 차와 집뿐인가. 매트리스도 렌털, 결혼식 하객도 렌털, 계약직(파견직)도 렌털. 제레미 리프킨이 20년 전 예언한 ‘소유의 종말’이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셈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더 이상 재산을 소유하는데 얽매이지 않게 된 인간은 이제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


  그러나 재산권이 퇴색한 뒤 인간 본성을 논하는 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내 동기들이 그러했듯 예쁜 후배님들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면서 당연한 수순으로 차를 사고, 원하면 결혼을 하고, 집을 구할 것이다. 이렇게 모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제 것을 얻기 위해 바빠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 K3도 아니고, K5도 아니고 K7을 박았다고?


 하트 모양 미소가 예쁜 정이는 최근 직접 렌터카를 몰고 가 친구들과 강원도로 놀러 갔다. 놀러 갈 때만큼은 근사한 차여야 한다는 사탕발림과 프로모션에 넘어가 고급 승용차를 빌렸는데 슬쩍 긁고 말았고 보험사에서 수리 견적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쓰디쓴 인삼주를 한 컵 더 퍼주면서 훨씬 일찍 차를 몰기 시작한 내 친구들은 웃겨 죽겠다며 연신 겁을 준다. 차가 없는 나는 그거 조금 긁혔다고 무슨 80만 원이나 나오겠냐며 같이 파랗게 질렸지만.


 인삼주에 인삼만 바닥에 남을 만큼 마시고, 사이버 강의를 들으면서 중간고사 공부를 하거나 새로 발령받은 팀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했다. 가진 것도 없는데 참 열심히들 경제 활동에 이바지하는구나, 하며 인삼주를 들이켜고 해롱해롱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역전의 가능성은 있다. 소유의 반대말은 무소유가 아니라 공유가 되는 시대. 즉 더 이상 가진 것으로 우리를 정의할 수 없다면, 이렇게 모여서 서로에게 얻은 조언, 지식, 사소한 기억 하나가 나를 구성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확실히 행복했던 기억으로 스스로 정의할 수 있다니, 시대를 잘 타고난 게 아니면 뭔가.



덧붙이자면 인삼주는 남자에게만 좋은 게 아니다. 다음날 기운 넘치는 숙취라는 걸 느껴야 했으니.



At the Table

-성(28, 석사 과정, 취미는 담금주)

-정(26, 사회복지사, 미소는 하트 모양)

-림(27, 신입사원, 내일이 월요일이라니)

-석(27, 4학년, 내일이 시험이라니)

-울(27, 4학년, 오늘이 연휴였다니)

-종(28, 회사원, 벌써 3년 차라니)

-수(28, 회사원, 월요일까지 휴가지용)

-희(26, 휴학생, 뭐든지 치킨은 뿌링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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