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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May 06. 2020

수줍은 파티에는 감바스 알 아히요로 자신 있게

05/02 광안리 테이블

‘ENTP 네 명이 모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지’


 어학원에서 새로운 분반 사람들을 사귀었다. 첫 수업 주제는 ‘성격’이었고 옹기종기 모여서 MBTI 성격 검사도 해보았다. 이십 대 초반이었으면 망설였을 법한 질문도 이제는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신경 씁니다’: NO).


 결과는 ENTP, 즉 설명서를 읽기보다 이것저것 눌러봐야 직성이 풀리며 정신 승리에 능한 데다 그게 안되면 친구와 술이나 퍼마신다는 성격이었다. 점쟁이 뺨치는 해설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흘끔 짝지의 결과를 봤는데 아뿔싸 내성적이고 원칙을 지키는 ISFJ. 새 친구가 하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와 다른 인류라니 좌절이었다. 다행히 나머지 분반 대부분 EN으로 시작하는 외향적인 사람들이었고 불행히도 신이 난 나머지 그들을 몽땅 집에 초대해버렸다.


 쏜살같이 토요일이 왔고 7명이 모인다고 하니 성의껏 한 가지만 만들고 피자나 치킨을 시키면 되겠지? 하고 여유를 부렸으나 역시나 약속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뾰족한 메뉴가 떠오르지를 않는 거다. 게다가 간단한 파스타 재료 조차 없는 상황. 집 청소하랴, 레시피 검색하랴 허둥대는데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ISFJ 짝지 현이었다.


‘감바스 알 아히요는 자신 있는데, 도와줄까?’



감바스 알 아히요(스페인식 새우 요리)

밑간 한 냉동 혹은 신선한 새우

올리브유, 페퍼론치노

편 마늘/다진 마늘 많이, 소금, 후추, 파슬리


1. 프라이팬에 불을 올리고 올리브 오일을 바닥이 잠기도록 붓고 데우기


2. 기름이 충분히 뜨거워지면 편 마늘을 먼저 넣고 노릇해지면 다진 마늘, 새우, 페퍼론치노 넣기


3. 새우가 붉게 익으면 불을 끄고 파슬리로 마무리



 현은 약속보다 정확히 2시간 일찍 도착해서 부엌 장비의 케파(capacity)를 꼼꼼히 살피고 잠시 고민하더니 곧장 필요한 레시피와 재료를 뽑았다. 나는 쫄래쫄래 장 보는 걸 따라다니고 필요한 조리 도구의 위치를 알려주기만 했을 뿐이고. 간단한 카나페를 만드는 동안 부엌에서 통통 야채 손질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 후로 뜨끈한 바게트, 새우로 만드는 감바스 알 아히요와 베이컨 토마토 파스타까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새우를 접시에 담으려 하자 현이 요리를 슬쩍 빼며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잠깐, 이건 원래 팬에 담아내는 거야’.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바야흐로 PR의 시대였고, 사교적이고 대담한 ‘인싸’가 온 우주를 정복했다. 내성적인 20대라면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불리하기 짝이 없다. 대학교에 입학하면 ‘선배님 밥 사주세요’하는 싹싹한 후배들이 족보를 받았고 학과 사무실 장학 아르바이트를 꿰찼다. 선배에게 자기소개서 첨삭을 받거나 교수님의 추천도 예쁜 짓 잘하는 동기의 몫이었다.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은 이제 논어나 맹자에서나 등장하는 유물이 되었고. 리더십과 협업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중고등학교에서도 조별과제와 토론이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자리 잡았다.

 

 성장 환경과 연결 짓기 쉽지만 내향적이거나 사교적인 성격은 대부분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갓 태어난 아기라도 특정 자극에 쉽게 흥분하거나 다소 느리게 반응하는 고유한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기록부에 다양한 활동을 기재하거나 이력서에 많은 경험을 적을수록  높은 점수를 주는 시스템은 천편일률적인 사회를 만들 뿐이다. 사내 식당에서 혼자 밥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 영업보다 사무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 모두가 존중받아 마땅하다.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잘해야 한다고 충고하기 전에.

 

 게다가 내향적인 사람이 소극적인 것은 아니다. ENTP 다섯 명이 모여서 정신없이 떠들고 있을 때 수줍은 두 사람은 부족한 술과 초콜릿 우유를 사 오고, 직접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고, 만취해서 나뒹구는 친구를 뒤로 한 채 깔끔하게 설거지까지 해낸다. 현이는 게다가 학교에서 밴드 활동을 했으며, 노래방을 좋아하고, 축가를 부를 예정이라고 고백했다. 너 내성적이라며? 내세우지 않을 뿐 수줍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표현 방법이 있다고. 결국 아래층 사람이 올라올 때까지 얼큰하게 노래를 부른 것은 잘못이지만…



 결국 만취한 외향인을 모두 택시에 태워 보내고, 오전에 일기 예보를 보고 챙겨 왔다는 우산을 꺼내 유유히 귀가하는 짝지의 뒷모습은 고고하더라. 이렇게 글로 써서나마 내성적이고 신중한 인류의 미담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차분함이든 수줍음이든 스스로 주먹밥 안에 든 것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가끔은 이런 파티에서 슬쩍 꺼내 자랑하면 더 좋고. 16가지라는 성격 유형의 세상 사람 모두를 식사에 초대해 보고 싶은 다채로운 밤이었다. 누군가 뒷감당만 해준다면 말이다.




at the Table

. 현(27, 수줍지만 노래방은 좋아함)

. 으녜(29, 수줍지 않고 노래방도 좋아함)

. 큰 훈(29, 뭐든 좋아하고 주식을 특히 좋아함)

. 정(25, 뭐든 좋지만 귀가는 일찍 해야)

. 작은 훈(25, DJ, 발라드를 좋아함)

. 베레모(28, DJ, 만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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