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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Jan 20. 2020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너에게 에그인헬

01/18 토요일 테이블

 작은 냄비에 버터를 두르고 밀가루를 풀자 가루 때문에 요란한 연기와 함께 버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큰 냄비는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옆구리를 흔들며 김을 내뿜었다. 이웃 사람들은 제르베즈가 음식 뚜껑을 열어 볼 때를 기다리며 버티고 서 있었다.

_에밀 졸라,『목로주점』(문학동네)



얼마 전 모교 취업전략과에서 전화가 왔다. 후배들을 위한 취업특강 청탁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5백 명 남짓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데다 우리 회사는 사람을 많이 뽑지도 않는데. 말인즉슨 대기업 공채가 끝난 지금 외국인 투자기업 취업 준비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채용도 안 하는데 무슨… 동시에 외국계라지만 중견기업 재직자가 하는 강의를 들으러 올까, 하는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 거절하려는데 문득 후배들 특히 여자 후배들 생각이 났다.


 - 부산교통공사가 이번에 2백 명 뽑는데요. 이렇게 많이 뽑는 건 이번 정권이 마지막이라는데 다른 공부가 손에 안 잡혀요.

 - 떨어지긴 했어도 삼성물산 최종면접까지 갔으니까, 올해는 자격증 취득하고 어학성적 올려서 다시 도전할 거예요.


왜 취업이 힘들까? 2017년 강남구 회사에서 인턴십을 마치고 5개월간 서울에서 취업 준비를 할 때 처음 알았다. 한국에는 대단한 여학생들이 많구나. 정말 많구나. 식품업체, 소셜커머스, 공공기관 최종면접을 대비하는 스터디를 모집하면 내로라는 대학교는 물론이고 미국 대학원 졸업, 글로벌 인턴십을 수료한 수재들이 모였다. 아닌 게 아니라 ‘헬조선’의 시대였다. 그런데 그 빼어난 여학우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


이번 주 토요일에는 헬조선 논란에 시원하게 사이다 아니 ‘에그인헬’을 먹여줄 지방대학교, 인문계, 이십 대 중후반의 대학 동기들을 불렀다. 참고로 나는 중간에 학부를 이적해 한동안 그들 사이에서 전과자로 통했다(너그러운 용서에 심심한 감사를). 에그인헬은 샥슈카라고도 불리는 중동식 토마토 달걀 스튜로, 연어 토스트를 곁들여 든든하게 먹이려고.



. 연어 토스트


▷ 훈제 연어 170g, 바게트 슬라이스(1통), 양파 1개, 마요네즈, 설탕, 레몬즙, 카놀라유


1. 오븐을 180도에 10분간 예열하고, 양파는 세로로 썰기

2. 바게트 위에 연어를 얹고 오븐에 10분간 굽기.

3. 마요네즈:설탕:레몬즙:카놀라유를 2:1:1:1 비율로 소스 만들기

4. 구운 연어 토스트 위에 양파를 올리고, 마요네즈 소스를 뿌린 뒤 그릇에 담기



.에그인헬


▷ 양파, 마늘, 계란, 토마토소스(2-3인분), 우유, 치즈(선택), 소시지(선택)


1. 양파, 마늘, 소시지는 잘게 썰어 프라이팬에 충분히 볶기

2. 토마토소스 2인분을 붓고 , 우유로 농도 조절하여 데우기

3. 익은 스튜 위에 계란을 깨서 얹되 노른자는 분리한 뒤 천천히 넣어 영롱한 달걀 모양 만들기

4. 모차렐라 치즈와 파슬리를 뿌려 마무리


내 친구 인이는 지난 타로 테이블에도 등장한 친구로 당시 공무원 준비생이었는데, 지난달 9급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해 현재 발령 대기 중(야호). 또 다른 동기 ‘하’는 고향 창녕군 읍내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여자 친구들은 다들 공공부문으로 갔구나, 싶지만 그 비율도 높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대리급 이상 여성 관리자 비율은 16.5%라고 한다. 그나마도 지난 2005년 10.9% 대비 상승한 비율이다. 그렇다면 11.2%인 제조업은 아직 10년 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인데. 우리 회사뿐 아니라 독일 본사에서도 과장급 여성은 가뭄에 콩 나듯 적은 걸 보니 비단 조선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마케팅팀 이제 여자 안 뽑는단다.


우리 회사 마케팅팀 사원 모집에 지원한 후배가 서류에서 탈락했다고 연락이 왔다. 인턴 경험, 나이, 전공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친구였기에 나도 적극 추천했다. 인사팀에서 알려주지 않은 탈락 사유는 옆 팀 선배에게서 들었다. 애초에 네 명 남짓 여성 직원으로 이루어진 마케팅팀에서 연달아 육아를 이유로 퇴사가 발생해 생긴 자리였던 것.


 그러고 보니 작년 영업부문 최초로 팀장으로 승진한 여자 과장님도 발령 한 달 만에 휴직에 들어갔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에게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또 그러고 보니 2년 내리 인사고과 S를 받아 부러움을 사던 비서 실장님도 결혼 후 돌연 퇴사를 선언했다. 이런 사정을 후배에게 알려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혼은 마땅히 소중한 삶의 한 장이고, 나도 그러했듯 모든 아이가 응당 엄마의 보호 아래 자라야 한다. 그러나 이쯤 되면 선배들에게도 조금은 떼를 쓰고 싶어 지는 것이다. 사장이나 임원까지도 아니고, 그저 시야에 머물러 주기를. 1박 2일 워크숍에 참여하는 여자가 나 혼자라 주눅 들지 않게 해 주기를. 퇴장하지 않고 버텨 주기를.


 그러나 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바람이므로 스스로 다독인다. 제조사 여직원이기 때문에 누구도 내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따라서 그때그때 상황이 닥치면 스스로 나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따뜻하게 데운 연어를 친구들에게 나눠주자니 한 살씩 어린 동기들이 새삼 기특하다. 처음부터 목표로 했던 일은 아닐지 몰라도 최선을 다해 얻은 차선의 삶을 살고 있다.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완벽한 직장을 얻기 위해 버티기보다 나에게 충분히 괜찮은 조건의 회사에서 버티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지방대학교, 인문계, 20대 중후반 여학우들이 새로운 기회를 가질 있도록 시야에 머물러 주는 것. 그러니 많이 먹고 힘내자.


…라고 해도 일요일 해가 저물면 출근 생각으로 배갯잎에 얼굴을 묻은 채 훌쩍이고 마는 것이다.


At the table

-인(26세, 9급 공무원)

-하(26세, 은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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