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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Feb 13. 2020

제대로 ‘삭은’ 명란 파스타와 연어구이

02/09 일요일 테이블

나는 주방으로 가 면을 삶고, 마늘을 썰고, 팬에 올리브유를 둘러 페퍼론치노와 바지락을 볶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나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취했다. 정작 그는 한 입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젓가락으로 면을 뒤적이기만 했다.

_『우럭 한 점 우주의 맛』(박상영, 창비)



 ‘20대 여자 옷’, ‘여자 친구 룩’

 최근 나의 검색어 기록을 발견하고 돌연 낯이 뜨거워졌다. 연관 검색어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직접 입력한 값이었다. 나의 일과로 말할 것 같으면 산업단지 출퇴근에 주말은 친구들과 집에서 보내다 보니 대낮에 싱그러운 이십 대 여성들이 무엇을 입고 다니는지 좀체 모르겠는 거다. 만족스러운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아 하마터면 지식인에 물어볼 뻔하기까지 했으나 몇 개의 쇼핑몰을 찾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나이 듦을 느끼는 경우는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교수님과 상담하던 중 정치며 경제며 학구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가 한마디 했다. 그런데… 새로운 전공을 배우기에 나이가 적지 않네요. 하던 일에 심화된 전공을 선택하는 편이 낫지 않아요? 진즉 느낀 바는 있었으나 그토록 공식적으로 나이를 실감한 적은 처음이었다.


 임상심리학자 Meg Jay는 인생을 결정하는 순간의 80%가 35세 이전에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일요일은 나처럼 늘어나는 나이테에도 불구하고 낭만과 방만을 제1의 미덕으로 여기는 친구들과 함께 했다. 가까이 사는 E언니와 승무원 준비생인 정, 캐나다 교포 D, 영국 사람 P가 맛있는 와인을 사들고. 설 선물로 받은 질 좋은, 나만큼 삭은 명란으로 만든 크림 파스타와 연어구이를 만들어 보았다.



. 명란 파스타


1. 끓는 물에 스파게티 면을 넣은 뒤 충분히 소금 간 한 뒤 7분간 삶기

2. 프라이팬에 마늘, 양파, 버섯을 잘게 다져 투명해질 때까지 볶기

3. 볶은 야채에 우유, 크림을 1:1 비율로 섞어 붓고, 껍질을 벗긴 명란젓 1 덩이 넣기

4. 삶은 면을 크림소스에 넣어 약불에 섞은 뒤 남은 명란 약간 고명으로 얹어 완성


 남녀노소를 불문한 고민이겠으나, 이십 대에 나이 듦이 두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겠다.


a) 시간이 흐를수록 진로의 선택지가 눈에 띄게 줄어서.

b) 나이가 찼는데 아직 이렇다 할 이룬 게 없어서.


특히 b)와 관련해 부모님 세대와 비교하는 것만큼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엄마는 지금 내 나이에 결혼식을 올려 이듬해 나를 낳았다는 말로 주말 내내 침대를 구르던 나에게 일격을 가했다. 이보다 더한 케이스는 스물여덟 살 친구 P인데, 아버지와 고작 스무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이쯤 되면 초등학생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견딘다고 고백했다.


 명절 친척 어른의 잔소리가 흔한 반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영국인 P는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고. 유럽인들이 죽고 못 사는 크리스마스지만 ‘한국에 있으면 언제 결혼할 거냐’ ‘한국에서 버는 돈은 충분하냐’ 등의 가‘족같은’ 질문이 지겨워 친척 집은 얼씬도 않았다고 한다.



 줄어드는 선택지는 아쉽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이 드는 과정에서 이미 혜택을 받고 있다. 나는 이제 나의 취향과 선호를 더 잘 이해한다. 선택에 실패하는 확률이 현저히 줄어드는데, 이는 어떤 열정을 찾았다기보다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충분히 경험하며 소거법을 거쳤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있다면 내가 어떤 분야를 더 깊숙이 파고들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또 나이가 들어서 좋다, 나쁘다기보다 특정 연령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련의 일들을 통해 사는 일이 다채로워졌다. 회사에서 우수 사원으로 선정되거나, 전세 대출을 통해 내 명의의 거처를 직접 고르게 되는 일 말이다. 이후 이 기억들을 통해 정보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독창적인 생산물을 만들기를 기대하게 된다. 이 이름 없는 친구들과의 만찬도 언젠가는 어떤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어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러한 자기 위안만큼이나 중요한 해법 하나는 의외로 팀장님에게서 얻었는데, 그는 철저히 계산된 낙관주의로 흐르는 시간을 즐기는 듯 보인다. 연금, 투자, 저축을 통해 조기 퇴직을 목표로 3억 모으기. 어떻게든 먹고 살 돈이 있으면 다음 도전이 두렵지 않을 거라고. 좁아진 만큼 깊어진 선택지에 대비 해 매월 조금씩 더 저축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사회초년생의 경우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최소 50% 이상을 권장한다). 동시에 대학원 진학이나 공인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하는 것 또한 자기 자본에 투자하는 셈이다.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어른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지난날 쳐다도 보지 않았던 명란을 먹게 된 것, 레몬 없이도 연어의 비린 맛을 좋아하게 되는 일은 매력적이다. 올해는 또 어떤 음식을 좋아하게 될까, 맛보게 될까?



At the table

-E (회사원, 29)

-정 (승무원 준비생, 25)

-D (학생, 27)

-P (강사,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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