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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May 24. 2020

호박죽 한 그릇에 집으로 갈 수 있다면

풀밭 위의 점심식사, 부산 시청

부산 삽니다. 인구의 30%가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인과 바다' 뿐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가 좋아서 직장을 옮겼습니다. 동네 친구랑 마실 하기 좋은 곳을 돌아다닙니다. 가끔 제 첫 자동차로 드라이브해서요.




 2017년 용선생은 3등급 치매를 판정받았다. 선생은 나의 외할머니로, 슬픈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어디로 보아도 치매는 도무지 슬픈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1927년생으로 마틴 루터 킹, 메릴린 먼로가 또래 친구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4.19 등 역사적 순간을 온몸으로 맞받은 산 증인이므로 나는 그를 선생이라 부른다. 부산 진구 한 남자중학교의 3평 남짓한 매점에서 일곱(인지 여덟인지 아홉인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으나) 명의 ‘자슥새끼’를 키웠고 모두 대학에 보냈으니 나는 또 그를 선생이라 부른다.


 국문학을 전공했을 적, 선생의 인생 이야기를 받아 적기만 해도 등단은 따놓은 당상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이를 테면 선생의 발 뒤꿈치에는 야물게 찢어진 흉터. 검버섯 사이로 흐릿하게 남아있다. 1940년대 일제의 강제 징용이 본격화되는 시절 용선생은 열여덟 살이 되었다. 사지가 멀쩡하거나 시집을 안 간 처녀는 끌려가기 십상이었고, 근방에 마뜩잖은 총각도 없던 터에 순사들이 동네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선생의 의붓오빠, 당시 이 치료를 하러 왕진을 다니던 치과의사쯤 되었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선생을 불러다 멀쩡한 아킬레스건을 수술로 찢어주었다. 다리를 절게 된 용선생은 그렇게 징집은 피할 수 있었으나 그 흉은 오래 남았다.


 이처럼 1940년대 이야기는 찬장에 넣어둔 상자를 꺼내 듯 뽀얀 먼지를 털어 깨끗하게 복원하는 선생이지만, 5분 전에 물어봤던 질문(‘니 월급은 얼마받노?’)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신묘한 병에 걸린 것이다. 같은 대답을 열 번 조금 안되게 했을 때쯤 엄마와 도시락을 싸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선생이 심심하셔서 그런 게 아닌지 싶었기 때문에. 마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토요일이었고, 햇살처럼 노란 단호박을 받았기 때문에 선생이 좋아하시는 단호박죽을 만들어보았다.




밥 솥에 20분, 3가지 재료로 만드는 호박죽



▷ 단호박 1통, 밥 1 공기, 물 4컵


1. 단호박을 통째로 전자레인지에 넣고 5분간 데우기
2. 한 김 식으면 부드러워진 단호박을 쪼갠 뒤 꼼꼼히 씨 발라내기
3. 호박 껍질을 벗겨낸 뒤, 밥 솥에 조각낸 호박, 밥, 물을 붓고 죽 모드로 밥솥을 작동시키기
4. 죽이 완성되면 설탕 약간과 소금으로 간 하여 완성




 눌러쓴 모자, 칭칭 동여맨 담요, 마스크에 안전벨트까지 채우고 시청 근처 마실을 떠난다. 도시락을 싸오긴 했지만 휠체어가 있으니 풀 밭 같은 데서 식사는 언감생심이고 야외테이블이 있는 카페를 가면 어떨까. 입구 턱이 높거나 야외는 흡연구역인 몇몇 가게를 아쉬운 마음으로 지나치는데 주차장을 개조해 매끈한 평지와 야외 좌석이 있는 작은 커피집을 찾았다. 사장님의 배려로 널찍한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호박죽을 쥐어드리면 배가 안고프다고 하면서도 후식으로 가져온 포도까지 선생은 금세 비우는 것이다. 나오지 않을 때는 몰랐지만 거제동 여기저기 다녀보니 휠체어를 끌고도 쉴 수 있는 가게, 공터가 생각보다 많다.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게 맞다며, 다음엔 어디 어디를 가보자며 몇 군데 점까지 찍어 놓은 바.



신나는 드라이브 후 귀가하자 선생은 다시 침대에 눕기가 무섭게 물었다. ‘니 월급 얼마 받노?’ ‘…’


 ‘왜. 월급 적으면 할무이가 좀 주게? 안 그래도 돈 없는데 잘 됐네. 어디 숨겨두고 까묵은 땅문서 없나?’ 하고 침대 맡을 마구 뒤지면 또 자지러진다. 그러다 갑자기 근엄하게 표정을 바꾸는 것이다.


 ‘월급 ○백○십만 원 번다고? 그기 짝은 돈 아이다. 90년도 식당(매점) 할 때는 한 달에 백만 원 이백만 원 들어와도 아홉 식구 다 믹이 살린기야.’


 2040년 평균 기대수명은 90세. 청년 2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자동화로 일자리는 줄어들고 경제 성장이 둔화되면서 보수, 진보는 더 멀리 양 끝으로 치닫고 있는데. 그러나 용선생은 나와 내 동생을 키웠고, 지금 우리가 그를 돌보고 있지 않은가? 결국 우리는 한 지붕에서 살다가 한 지붕으로 돌아올 사람들이라고. 어쩔 수 없는 번거로움은 받아들이고 가끔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간다면 어떨까. 아니면 야외 테라스에 휠체어를 주차할 수 있는 맛있는 커피 집이 많이 생긴다면. 무엇보다 호박죽은 만들기 정말 쉬우니까.


달려 달려



At 텐퍼센트커피 부산시청본점

부산 연제구 시청로 20

시청역 7번 출구

주말 09:30 - 20:00 / 평일 07:30 -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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