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해수욕장, 앨런 홀링허스트의 「수영장 도서관」
헤엄친다는 것은 또한
물의 의미를 붙잡는 것이고, 물의 품 안에서 움직이는 일이고
움켜잡는 것과 잡히는 일 사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찰스 톰린슨, 〈체난고 호수에서 수영하기 Swimming Chenango Lake 〉
지난 4월, 퇴근하려는 팀장을 불러 세웠다. 그는 내 면담을 이미 한차례 거절한 바 있었으므로 붙잡는 수밖에 없었다.
‘못하겠어요. 너무 많아요.’
그가 늙고 지친 이마를 추켜올려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까만 눈동자만큼은 전성기 때처럼 빛났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라고라는 말, 학교를 졸업한 뒤로 오랜만에 들었다. 그 말은 무관심과 경멸을 녹여 만든 만든 도끼였고, 남아있던 가느다란 내 마음을 단박에 끊어냈다. 나는 해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우선순위를 정해주세요.’
동료들의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팀장은 알았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그 후 두 번 다시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송도(松島)라는 지명은 만 입구에 소나무가 울창한 작은 반도가 붙어있는데서 유래했다. 1929년 발행된 부산의 명소 안내도를 보면 소나무가 빽빽하게 그려진 아담한 해변이 보인다. 하지만 태풍, 염분으로 인한 시설 노후화, 하수의 무단 방류 등으로 오염이 심각해지면서 과거의 영광은 잊은 모습이다. 사실 지금의 풍경은 해수욕장이라기보다 넓고 깊은 수영장에 가깝다. 잔잔한 파도, 동그랗고 좁은 만을 따라 펼쳐진 안온한 바다와 고인 물 냄새. 매일 새벽이면 건강하고 튼튼한 동호인들이 줄지어 헤엄치는 모습까지.
나는 누구와도 섞이지 않고 혼자 바다로 수영하러 갔다. 사전 조사를 해서 송도가 초보자에게 수영하기 좋은 곳임을 알고 있었다. 서핑할 때 입었던 3mm 슈트를 챙겼지만, 넓은 바다에서 헤엄치려면 그 말고 뭐가 필요한지 몰랐다. 발이 닿지 않고 물안경에 김이 서려 앞도 잘 보지 못한 채 버둥거리자, 한 무리의 동호회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중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젊은 여자가 새벽에 수영하러 왔다는데 감동한 듯, 내 자세를 하나씩 고쳐주었다. 오리발, 물에 뜰 수 있게 해주는 부이(buoy), 김서림 방지액 등 필요한 장비도 알려주었다.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언니야’ 한 명이 다음 주 동호회 모임에 나오지 않겠냐 물었다. 그녀가 해안가 멀리 한 곳을 가리켰는데 깊은 물에서 줄지어 움직이며 자로 잰 듯 맞추어 물장구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제가 잘 못해서, 폐를 끼칠 것 같아요.’
나는 이미 뭍에서의 일로 충분히 기가 죽어있었다. 언니는 이번엔 얕은 물에서 어깨까지만 잠긴 동호인 무리를 가리켰다. 그 앞에서 키가 크고 날씬한 한 남자가 큰 소리로 호흡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가씨도 배우면 돼. 우리 가르쳐주는 선생님도 저기 있어.’
언니가 그 선생에게 손을 흔들어 아는 척을 하자 그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은 무료 수강생은 충분한 듯했다. 나는 혼자 충분히 연습하고 나가겠다는 말로 거듭 거절하고는 나의 물로 돌아갔다.
송도해수욕장, 수영하기 전 읽기 좋은
앨런 홀링허스트의 「수영장 도서관」(창비)
헤엄치는데 특별한 장비나 기술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영국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는 데뷔작 '수영장 도서관'에서 헤엄은 치지 않으면서 떠있기만 해도 황홀해하는 인물의 모습을 묘사한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손은 엉덩이에 대고 있었는데, 몸은 하얀 풍선 같은 배 덕분에 떠 있는 것 같았고 다리는 아래로 비스듬히 내리고 있었다.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몸이 황홀경에 빠져 있는 동안 밀어 넘긴 물안경 때문에 그의 눈은 머릿속에 들어가 박힌 듯한 모습이었다.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반쯤 잠긴 에어매트 위에 있기라도 한 듯 그냥 누운 채 떠 있는 모습에는 뭔가 경이롭도록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때때로 그는 유순하지만 괴상하게 생긴 양서류처럼 손을 약간 저어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수영장을 나왔다.
새벽에 수영을 하니 갓 떠오른 둥그런 태양이 물안경을 뚫고 빛났다. 마침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며 물 밖으로 나오자 아까 동호회에서 호흡하는 법을 가르치던 선생이라는 남자도 물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혼자 할 거 없이, 그냥 나오시면 됩니다.’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지나쳐 가더니 동호회 무리로 사라졌다. 차로 돌아오니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온통 빛으로 차오른 탓이었다.
*커버 이미지: Samantha French, Sink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