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해수욕장, 비 내리는 물속에서 헤엄치기
‘비야, 비가 오기 시작해.’
그런데 비가 미친놈처럼 오기 시작했다. 물통을 들이붓듯 억수로 내렸다. 아이들의 부모들, 엄마건 누구 건 모두 다 젖을까 봐 회전목마의 지붕 밑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한참 동안 벤치에 그냥 앉아 있었다. 그래서 꽤 젖고 말았다. 사냥 모자가 좀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흠뻑 젖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피비가 목마를 탄 채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자 나는 갑자기 행복을 느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큰 소리로 마구 외치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여하튼 피비가 파란 외투를 입고 빙빙 돌고 있는 모습―이건 너무나 멋있었다. 정말이다. 이건 정말 보여주고 싶다.
-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비 많이 오는데 취소 아닌 거 맞죠?’
빗길을 운전하는 내내 혹시 취소한다는 문자가 올까 봐 휴대폰을 힐끔거렸다. 여우비도 아니고 소나기가 이렇게 내리는데 아침부터 수영이라니. 하지만 ‘언니야’가 별 말이 없었기 때문에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운전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언니야란 내가 지난주 송도 바다수영장에서 만난 상냥하지만 좀 제멋대로인 수영객으로, 홀로 허우적대는 내게 다가와 영법부터 장비까지 두루 알려줬던 다정한 새 친구다. 나이는 사십 대 후반쯤?
언니야는 제대로 수영하려면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가야 한다며, 내게 오는 토요일 아침 5시 10분까지 나오라고 통보했다. 휴일 새벽에? 나는 딱히 어울리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나는 구시렁대면서도 그 전날 물놀이 가방에 새로 산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새로 산 오렌지색 부이, 튼튼한 마레스 오리발, 시야가 넓은 물안경. 놀려고 시작한 취미치고는 많은 장비가 필요했고 일주일 내내 당근 마켓을 뒤적이며 발품을 팔았다. 혼자 하든 여럿이 하든 제대로 바다 수영을 해보고 싶었고 누군가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우리 일정이 취소될 수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주차장으로 진입하자 하얀 SM5 뒤로 능숙하게 수영 슈트를 입고 있는 언니야가 보였다. 나는 아직 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사십 대 여자와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난 아직 몰랐다(언니야란 말도 그녀가 나한테 정해준 호칭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슈트로 갈아입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우천이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주차장에 모여있었다. 어느 순간 빗줄기가 굵어졌고 이제 장대비라고 부를만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틀림없이 물속으로 들어갈 것임을 깨달았다. 오랜 가뭄 뒤 내리는 비를 보는 소작농처럼,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즐거운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야는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며 두 명의 동행을 데려왔다. 한 명은 그가 ‘오빠야’라고 부르는 나이 지긋한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제현이라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여자애였다. 제현도 한 달쯤 전부터 오픈워터 수영을 시작했고, 언니야와 같은 수영장을 다니다 가까워져 따라 나왔다고 했다.
우리는 짝을 지어서 헤엄을 쳤다. 아직 수영이 서툰 내가 오빠야(라고 해도 차마 그렇게 부를 수 없어 삼촌이라 하자)와 팀이 되어 파라다이스 호텔 방파제 끝에서 동백섬 쪽 방파제 끝까지 2.3km를 왕복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머리를 박고 헤엄치다가 문득 삼촌은 어디로 갔지? 싶어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먼저 와 내 왼편에서 물장구를 치며 기다리고 있었다. ‘토끼와 거북이’의 한 장면 같았다. 땅이 아니라 물에서 경주한다는 점이 다르지만.
가타부타 말도 없이 둥둥 떠다니는 그 때문에 약간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곧 누군가 이 너른 바다에서 내가 따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분, 물속에서 다른 사람이 팔을 힘차게 젓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분이 꼭 돌고래 무리의 일원이 된 듯했다. 처음 물에 잠겼을 때 들었던 본능적 두려움은 사라지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 듯 편안함이 찾아왔다. 침대 밖에서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모두 더 즐거워했다.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이 참 많구나.
제현은 뽀얀 피부에 동글동글한 생김새와 다르게 팔다리가 길쭉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오더니 철인 3종 경기에 참여하고 싶은데 나에게 같이 준비를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철인 3종이요? 왜요?’ 요즘 남녀가 어딨냐고 하지만 어린 여자가 혼자 훈련한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제현은 질문이 익숙한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서른 살인데요, 뭐든지 도전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그 말에 나는 잠시 황홀해져 어지러웠다.
‘이번 달 말에 거제도에서 열리는 오픈워터 수영대회 같이 나가지 않을래요?’
반짝이는 제현의 눈을 피하려고 나는 몸을 뒤집었다. 바닷물 속에 귀를 담그고 있자니 상공 1.2km에서 빗방울이 쏟아져 여기저기 터지고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달고 시원한, 바다 맛 사이다를 들이켜기 위해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