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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Sep 24. 2022

숨 쉬러, 더 깊이

위니프레드 갤러거 「몰입, 생각의 재발견」

“예.”내가 대답했다.
 어쨌든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녀, 안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나는 물속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며 아버지를 쫓아갔다. 함께 물장난을 치면서 놀이의 즐거움, 물의 즐거움,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된 마음의 즐거움을 되찾았다.
 -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언제부터였지? 민소매를 입으면 드러난 어깨가 둥글고 단단했던 건? 언제부터 송정 앞바다를 따라 두 번 왕복해도 숨이 가쁘지 않았던 건?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속이 오히려 편안해진 건? 언제부터 월요일이 두렵지 않고 주말이 숨차도록 바쁘지 않았던 건?


 비린내가 진동하던 송도 앞바다도 가을 하늘 아래 제법 청명해 보였다. 제현과 송도 해수욕장으로 바다 수영을 하러 왔다. 제현은 이제 철인 3종 준비 막바지로 돌입해 오리발 없이 헤엄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핀과 스노클이 있어야 헤엄을 쳤다. 그래도 속도는 비슷했으므로 제현은 너그럽게 나의 반칙을 이해해줬다. 이제는 새벽 다섯 시 반도 한밤중처럼 어두워 앞이 보이질 않았다. 나와 제현은 느긋한 준비 운동을 한 뒤, 조금씩 하늘이 밝아지며 수면을 눈으로 볼 수 있을 때쯤 물로 들어갔다.


 제현이 오리발 없이도 나를 앞서가고 있을 즈음, 나는  번씩 고개를 들어 해수욕장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보는 풍경은 모래가 있고  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하지만  시야는 파란 바닷물이 먼저, 그다음 상아색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 물로 들어갈 때만   있는  특별한 풍경을 나는 계절이  가기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잔인한 달 4월을 넘기자 봄의 끝자락부터 물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바다의 계절은 육지보다 두 달 늦다). 해수면은 청량한 햇살을 받아 파도 꽃이 피어올랐고 나는 바다 수영을 시작했다. 해답 없는 일상으로부터 도망가자는 심산이었다. 물가로 향하며 내내 ‘이게 다야?’하는 잡념이 들었다. 적성과 맞지 않는 일, 부모님 집을 떠나지 못함, 애인으로부터 당한 잠수 이별.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삼십 년도 이보다 더 지루하면 지루했지 더 재밌을 리 없겠지.


 오픈워터는 까닥 실수하면 신문 1면을 장식하기 십상이므로 나는 집중했다. 헤엄치는 자세, 나를 밀어내는 거친 파도, 같이 헤엄치는 사람들. 깊은 주의를 기울여 움직였고 나와서 보니 그 행위가 바로 몰입이었다.


 헤엄치면서 나는 승모근뿐만 아니라 집중력도 키웠다. 노력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매일 아침 차를 몰아 광안대교로 향하고, 수영장이 나오는 소설을 찾아 읽고, 훈련일지를 쓰고,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차 시트를 적시는 줄 모르고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기까지. 나는 그것이 몰입인 줄 몰랐다. 그저 매우 즐겁다는 것만 알았을 뿐.


 행동과학자 위니프레드 갤러거는 저서 「몰입, 생각의 재발견」을 통해 이렇게 결론지었다. ‘나는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 목표를 신중하게 선택할 것이다. 그다음 거기에 골몰할 것이다. 요컨대 집중하는 삶을 살 테다. 그것이 최선의 삶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거친 파도가 덮칠 때 나는 목숨을 건사하려고 발버둥 쳤다. 생의 감각,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새삼스러우면서 오랜만이었다. 그 시간은 최선의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강해졌다. 또 시간을 단단히 붙들어 매고 있었으므로 나는 자유로웠다.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되어서 멀리 가지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자유는 멀리 있거나 사라진 게 아니라 저 바다 깊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유의 강박에서 벗어났다.


 물론 여행, 새로운 도시, 새로운 사람과 같은 물리적 자유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과 연결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잔인했던 지난 4월 내내 들었던, ‘이게 다야?’하는 질문은 왜 살고 있냐는 말이기도 했다. 당장은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고, 그 물음을 잠시 음미한 뒤, 물속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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