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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Sep 12. 2022

내가 아닌 여자들

힐튼호텔 수영장과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물 밑에서 위를 향해 비치고 있는 푸른빛 수중 전등 때문에 수영장 주변은 은은한 달빛을 받은 듯 흑백사진 같은 풍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말랑말랑한 과일 조각 몇 개가 남아있는 유리잔은 다이빙 보드 끝에 놓여 있었다. 수영장 물 위에 시체 따위는 없었고, 천막의 어둠 속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으며, 숲 속에 ‘쉿’ 하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쌍둥이 형제를 찾으려는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물빛과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에 매료된 브리오니는 수영장 주위를 천천히 거닐었다.
 - 이언 매큐언, '속죄'


 나는 막 코로나로부터 회복한 상태였다. 이 병의 후유증인지 가벼운 외로움 때문인지, 격리가 끝난 후 사고와 감각이 뒤죽박죽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누구든 간절히 보고 싶었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같이 수영을 다니던 제현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때는 혼자인 시간이 위험할 정도로 오래되었을 즈음이었다. 제현의 쿠폰을 써서 집으로부터 1시간 거리의 기장 힐튼호텔 워터하우스로 향했다. 비키니 한 장, 책 한 권 챙겨서.


 1794년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쓴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금지된 결투를 벌인 죄로 42일 가택연금형을 받았다 형벌이 끝나는 날 이렇게 고백했다.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나를 다시 짓누를 것이다. 이제 격식과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나의 격리 해제일은 토요일이었고, 가족과 회사의 품으로 다시 뛰어들기 전 스스로 물을 조금 적시고 싶었다. 토요일 호텔 수영장은 적절한 인파와 거리두기로 활기차면서도 한산했다.


 야간권을 사용해 오후 여섯 시 즈음 수영장으로 들어가자 야간 조명이 켜지면서 물은 보라색과 남색이었으며 빛줄기가 물결을 따라 흔들리며 수면 위로 금색 실선을 만들었다. 날이 쌀쌀해져 시끌벅적한 관광객이 빠져나가고 달빛 아래 헤엄치는 흥취를 누리려는 수영객만 남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남자끼리 온 무리는 없고 온통 여자, 여자, 여자였다. 오랜만의 바깥 활동 때문인지 모든 풍경이 낯설었고 꼭 박물관으로 온 기분이었다. 나와는 다르지만 선택할 수도 있었을 삶이 전시된 곳으로.


 내가 아닌 여자들은 연인, 신혼여행 온 새신부, 아이 엄마 중 하나였다. 이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20대였던 시간이 하나씩 떠올랐다. 더 배려할 수도 있었을 친구, 결혼할 수도 있었을 연인, 해낼 수도 있었을 시험과 업무들이. 그때 왜 견디지 못했을까? 왜 더 잘 지내지 못했을까? 우리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는 만큼 어떤 사람이 아닌지도 생각한다.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내가 아닌 여자들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부러워져서, 외로워져서 물 밖으로 따라 나왔다.




 난 왜 내가 속한 무리에 어울리지 못할까? 내가 한 말이 아니라 토마스 만이 쓴 자전적 단편 「토니오 크뢰거」 속 고독하고 예민한 주인공 토니오가 스스로 묻는 질문이다. 토니오는 금발의 파란 눈을 한 친구, 긴 다리와 애교 있는 성격으로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한스를 동경한다. 그는 스스로 한스처럼, 아버지의 기대처럼 공부를 잘하고 명랑하고 평범한 소년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안타까워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곳저곳 떠돌며 주변인으로 머문다. 그의 애인 리자베타는 그보다 어른스럽다. 고독을 호소하는 토니오에게 리자베타는 처방을 내린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토니오. 그래서 오늘 오후 당신이 얘기한 것을 통틀어 알맞은 대답을 해드리고 싶어요. 당신이 그렇게까지 풀지 못해 애쓰시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지요.  들어보세요! 해답은, 거기 앉아 계시는 당신은 아주  잘라 말해서, 시민이란 말이에요.”

 “제가요?”

 “그렇지요,  심한 말일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해드리고 싶어요. 토니오 크뢰거, 당신은 길을 잘못  시민입니다.”


 수많은 사람 시민 중 하나에 불과한 자신. 토니오는 침묵한 뒤 모자와 지팡이를 챙겨 집으로 돌아간다. 진정한 예술을 좇아 이탈리아로 떠나려던 계획을 접고 아버지의 나라이자 자신이 본래 출발했던 곳인 덴마크를 찾아간다.


 비슷한 말을 어릴 때부터 들었다. 평범해지기가 더 어렵다고. 긴 생머리의 연인, 명랑하고 활기찬 새신부, 상냥한 엄마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행복이 몰려왔다. 동경과 우울함, 선망과 약간의 경멸이 섞인 행복감에 젖어 나는 여자들 틈으로 파고들기로, 평범한 삶을 찾기로 결심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속 사람들은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다. 박물관 속 여자와 나는 같은 물속을 헤엄친다. 나는 잠시나마 그 여자, 내가 아닌 여자를 느낀다. 내가 살 수도 있었을, 내 것 아닌 하루를 생각한다. 믿기 어려웠던 나의 평범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편안해진다. 나는 길 잃은 한 명의 시민이다. 물 밖에서 내려다보니 수면에 비친, 연인도 아내도 엄마도 아닌 나만 동 떨어진 느낌이다. 참을 수 없이 추워져서, 외로워져서 최선을 다해 평범한 삶으로 헤엄쳐 들어가기로 한다. 동경했던 세계는 하나의 신앙심으로 남겨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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