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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Oct 10. 2022

푹 잠든 것 같은 헤엄

러너스하이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

 “예수님, 성모님, 마호메트님, 비슈누님! 널 만나서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 리처드 파커!
포기하지 마, 제발. 구명보트로 와. 호루라기 소리 들리니? 휘이이! 휘이이! 살고 싶지 않니?
헤엄쳐. 헤엄치라구!”
 - 얀 마텔, 「파이 이야기」


1.


 유난스러운 줄은 알지만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 서른 번째 생일. 그날 새벽 네시 반이 되자 눈이 절로 떠졌다. 수영복과 웻 슈트, 부이, 오리발을 차례로 포개 넣은 스포츠백을 챙겨 차를 몰아 송정으로 갔다. 제현은 얼마 전 자신의 서른 번째 생일을 기념해 30㎞를 달렸다.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나도 생일 아침 3㎞를 헤엄쳐보기로 했다(물론 제현처럼 30㎞를 달릴 수는 없었다. 도버 해협만 해도 직선거리로 34㎞지 않은가).


 10월로 접어들자 날은 추워지고 물은 따뜻해졌다. 가을 바다가 춥지 않냐고들 물었지만 오히려 쌀쌀한 가을바람을 피하려 물속으로 뛰어들 정도였다. 깊은 바닷물이 아직 여름의 온기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봄쯤 시작했던 오픈워터 수영을 가을까지 다니고 있노라니 궁금해졌다. 수영은 어떻게 힘든 기억을 행복감으로 승화했는가?


 니체Nietzsche 초인이 고통으로부터 배움을 얻는 존재라고 했다. 나의 경우 힘든 시간을 겪고 자유를 배웠다. 파도를 헤치고 헤엄을 치면서  신체능력을   있었고, 조류와 풍향을 읽는 법을 배웠다. 눈앞의 일로 빠져드니 회의적인 생각을 떠올리거나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할 정신적 에너지가 없어졌다. 마법의 텔레포트라도   제자리에 있어도 무한히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는 격렬한 달리기를 할 때면 ‘거울 자아’ 즉 주변 사람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는 행위를 멈춘다고 했다. 가장 유익한 목적을 위해 자아가 잠잠해진 것이다.


2.


 지난 7월 30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머리털이 나고 처음으로 수영대회를 나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날은 내가 없어진 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쉰 여명의 참가자 중 거의 마흔여덟 번째로 2㎞ 경주 코스의 절반인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제한 시간 40분 안으로 도착할 경우만 완영으로 인정했는데, 아무리 봐도 나는 시간을 지키지 못할 성싶었다. 내 뒤로 빨간 구조 보트가 바짝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보트를 몰고 있던 요원 한 명이 소리쳤다. ‘저 빨간 부표만 쫓아가요.’ 호흡이 가빠지고 어깨가 뻐근해져 코스를 이탈해 가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소시지처럼 통통한 부표를 찾아냈다. 이어진 부표 끝으로 결승선이 그려진 모래사장이 보였다.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만 하고, 아마 내가 될 테지. 그렇다면 완주라도 해야겠다, 이 정도 남은 구간이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야 할 길이 보이고 컨디션이 파악이 되면서 자동 주행 모드를 켜놓은 마냥 팔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다음 남은 기억은 파란 물속 풍경과 잠든 듯한 편안함 뿐이다.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무아지경이라 했다. 그날 대회장을 나서는 나는 경기장으로 들어설 때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3.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주변의 환경 자극이 있는 상태로 운동을 할 때 신체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행복감을 말한다.「달리기, 몰입의 즐거움」을 쓴 칙센트마히 박사는 몰입은 당장 실행되지 않으며 일정 수준의 기술과 동료의 피드백이 필요하다고 했다. 언니야, 제현, 삼촌하고 헤엄칠 때면 돌고래 무리의 하나가 된 듯한 편안함 즐거움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자세와 호흡을 조언해주고 뒤쳐질 때 뒤로 와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안심되곤 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형광색 부이가 시야에 머무르기만 해도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이쯤 되니 나는 짧은 인생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깨달음을 얻었다. 자유는 세계일주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 힘든 감정을 날려버리기 위해 몰입이 필요하고, 몰입하려면 안정을 주는 이가 있어야 한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정착이지만, 제대로만 해낸다면 근사한 행복감을 선사할 것이다.


 3천 미터 수영을 마치고 나서 벌러덩 배를 뒤집고 물 위로 떠있자니 가릴 것 없는 하늘이 펼쳐졌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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