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다 수영과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계속 그렇게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생각했다.
“어때?” 장님이 말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딘가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정말 대단하군요.”
-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1.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인간이 일상 속 자신을 넘어 미래의 또 다른 자신을 향해 스스로 던지는 선택 행위를 사르트르 Sartre는 기투(企投)라고 일렀다. 모든 사람은 불완전한 현재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더 완전한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
2.
바다 수영을 하고 돌아온 날이면 오래도록 반신욕을 했다. 뜨끈한 물로 몸을 담그고 찬 새벽바람을 쐬었던 몸을 녹이고 있으면 여전히 바다 위를 떠있는 기분이 들었다. 가을 바다는 그 하늘만큼 맑고 따뜻해서 고개를 담그면 새끼 돔, 노래미, 작은 은색 물고기 떼를 만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한번 보고 나면 플라스틱 포장이 과한 밀키트나 선물 따위와는 멀어진다. 이 물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는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으면 한다.
바닷물은 시퍼런 광채로 잡아먹을 듯 달려들다가도 호흡을 다듬고 있으면 영사기가 다음 장면을 넘기듯 찰칵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이 오면 물은 부드럽고 고요하며 신비롭고 믿을 수 있는 곳으로 바뀐다. 나는 느릿느릿 팔을 저으며 그때를 기다렸다. 같이 있던 언니야가 말했다. ‘여기서는 호흡이 와따야. 팔을 너무 빨리 바꾸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천천히 저었다. 미끈한 팔근육을 가진 마흔아홉 살 언니야는 우아한 자세로 노를 젓듯 먼저 헤엄쳤다. 빨리 할 것 없다는 말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서두르지 않는데도 안간힘을 써야 했다.
늦여름 온도로 접어든 송정 앞바다는 일곱 시가 되면 태양이 고개를 비추기 시작했다. 바다 위로 올라온 태양을 새벽 구름이 가려 커튼을 친 듯 하늘 위로 햇살이 일렁였다. 태양이 만드는 금색 오로라를 보는 기분이었다. 나, 언니야, 제현과 삼촌은 마음껏 투명한 물속을 헤엄쳤다. 이 주말이 끝나면 어김없이 출근을 하고, 전화를 받고, 울컥했다가 남을 위로하기도 하며 햄스터 쳇바퀴를 돌릴 것이다.
귀농해 목장을 운영하는 데 성공한 한 자연인은 말했다. ‘사람들은 나한테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들 하는데, 난 오히려 용기 있는 건 그들이라고 생각해요. 냉수와 온수가 나오는 수도와 따뜻한 장판을 갖춘 역겨운 도시의 집에 살면서 영화관, 친목회, 서글픈 직업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더 나은 삶을 꿈꾸지도 못하고 살잖아요.’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골로 도망치는 일만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산과 바다를 아끼고, 자주 찾고, 친구를 모으고, 시간을 쪼개어 이를 누리는 행동이야말로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방식이 아닐까.
그토록 비키니 꿈을 꿨던 이유는 이런 도시의 삶, 직업인으로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을 테다. 처음 바다 수영을 시작했을 때 나는 궁금했다. 과연 계속하면 삶은 바뀔 것인가? 그렇다면 나한테 어울리는 삶은 무엇일까? 첫째로, 내 하루는 느리지만 분명히 바뀌었다. 나는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도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자유를 누리는 법을 알아냈다. 둘째로, 나한테 어울리는 삶은 몰두하는 삶일 것이다. 영화관과 친목회, 서글픈 직업이 정신을 독점하려 들겠지만 나는 최대한 삶에 집중할 것이다.
사는 동안 경제적, 가정적 또는 직업적 제약 등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예견하기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꾸준히 쓰고 실천해서 삶의 많은 부분이 내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온전히 실현한 기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더 물속을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