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병아리들
철학 학원이라니.. 철학과 학원이라는 두 명사의 조합은 내가 봐도 어딘가 이상하고 어색했다.
학교 홈페이지에 뜬 "철학 학원 선생님을 구합니다"라는 공고에 과 동기가 연락이 왔다. 너 한 번 해봐!
내 전공은 철학이었고 남들이 하지 않는 철학 교직이수를 유일하게 하는 사람으로서 지원 자격에는 딱 적합했다.
그렇게 어딘지도 모르는 학원에 연락을 했고 바로 면접을 보러 가서 처음으로 시급 협상을 했다.
알고 보니 그동안 과 선배들이 이 학원에서 15,000원이라는 시급으로 일을 계속 해왔었다는 사실을 면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시급이 높아 당장 할게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갈 뻔했지만, 이전 영어학원에서 얻은 교훈으로 무작정 달려들기보단 최대한 장점과 단점을 따져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점>
1.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적당한 근무 기간)
2. 높은 시급
3. 전공과 관련된 일 (재밌음)
<단점>
1. 너무 먼 거리 (버스 환승 필요)
2. 커리큘럼도 교재도 없어 내가 기획하고 교육해야 하는 수업 (귀찮음)
장단점을 살펴봐서 그냥 뱉어나 보자라는 마음으로 "제가 직접 다 진행해야 하니 부담감도 좀 들고 무엇보다 거리가 조금 있어서.. 시급이 2만 원이면 할게요."
내가 말하고도 약간 놀란 당돌한 제안이었다. 사실 만 오천 원도 감지덕지하며 할 수 있는데 조금 귀찮을 것 같아 던졌던 2만 원 제안에 원장님께서 당황하시다가 오케이를 하셔서 얼떨결에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시급과 별개로 욕심이 나는 일이기도 했다. 인문학 강연자가 되고 싶어 철학과에 진학했던 사람으로서,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인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흔하지 않은 기회였다. 나름 피피티도 만들고 이 책, 저 책 선별해가며 준비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첫 수업을 시작했지만,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우선 학생들은 철학에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원장 선생님도 인문학 공부의 부재가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교육 문제에 열변을 토했던 사람 치고는 심드렁했다.
알고 보니 원장샘의 철학 수업 아이디어는 가장 학구열이 센 지역의 사교육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한 보여주기 식 수업에 불과했다. 나에게 어렵게 진행할 필요 없이 그냥 책을 읽고 독서 활동 쪽으로 수업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원장님의 말에 나의 수업 의도와 다르게 일이 흘러갔다.
물론 시급 2만 원에 독서활동만 하는 것은 '꿀' 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나의 욕심과 애살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또 편한 거에 점점 익숙해지다 보니 나 역시 수업 준비를 점점 안 하게 되었고 학생들이 책을 안 읽어오면 그냥 영화를 같이 보는 것으로 대체하고 농담을 주고받는 수업들이 되었다.
그래도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물어보는 정답 없는 질문이 있는 수업을 경험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은 남아있었다. 나의 기획의도와는 다른 수업들이었지만 최대한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라는 질문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경쟁이 심한 지역에 사는 14살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만 반복하는 삶을 살았고 부모님과의 대화보단 집에 일해 주시는 아주머니와의 소통이 더 많았다.
한 아이는 자신의 최악의 시절로 초등학교 6학년, 가족이 보내'버린' 미국 어학연수를 뽑았다. 친구도 없는 환경 속에서 영어만 사용해야 했던 시기는 지옥이었다고 다시는 안 가고 싶다며 이야기하는 아이가 불쌍하기도 하면서 경쟁 사회에 태어나 본인 의지 없이 고생하는 아이들이 딱하기도 했다.
2학기에는 타지로 교류학생을 가게 되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었지만, 색다른 경험이었고 확실히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수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나의 재능에도 맞다는 것을 깨달았던 사회생활이었다.
물론 원장님과의 관계는 좋게 끝나지는 않았지만(다단계로 나를 끌어들이려고..) 가끔 회상하면 아득한 추억으로 남은 일이었다. 본인의 의지가 거의 없는 삶을 살아가던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씁쓸한 상상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