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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Sep 14. 2024

마중

기차역에서 기다리다

마중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허림, [보내지 않았는데 벌써 갔네] 달아실




연휴가 시작되었다. 가족과 고향이라는 단어가 이때처럼 자주 등장할까.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아늑하고 애잔하다.

우리 4남매가 장성하여 뿔뿔이 흩어지기 전 흔적들이 시골에 있다. 우리 세 자매가 쓰던 방에는 꽃무늬 벽지를 배경으로 태광 에로이카 전축이 지금도 벽면 한 면에 버티고 있다. 거기엔 LP판도 그대로 있고 오래된 사진도 그대로 있다. 우리  세 자매가 물려 입던 옷을 넣었던 서랍장은 이제 아버지 옷이 채워져 있다. 언젠가는 그 서랍장이 비워질 날이 오고 그때는 그 낡은 집도 비워지겠지. 그전에 낡은 집에서 잠자는 추억들을 다 끌어오고 싶다.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밀봉하고 싶다.


오래전 사람이 떠난 옆 집의 흙 담장은 무너져 내렸고 거기엔 여러 색깔의 크고 작은 나팔꽃들이 새초롬하게 피었다. 마당까지 잠식한 잡초들과 큰 비에 풀썩 주저앉아버린 안채 위에도 잡초는 위세 등등 했다.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아버지는 사람이 떠난 그 집 흙담 밑에 땅콩, 들깨, 호박을 심으셨다. 얼마나 먹는다고 더위에 그걸 가꾸시냐고 불효녀 둘째 딸은 아버지를 타박했다. 땅을 일구지 않고 그냥 두면 죄가 된다고 여기시는 분에게 그런 말은 가당찮았다.

농사일 그만하시라 해도 "김장 안 할래? 김치 안 먹어? " 하시며 내 입을 다물게 하신다. 큰 딸이 좋아하는 속 노란 배추를 늦가을에 보여주시고 싶으신 거다. 아버지의 큰 딸은 살림밑천이었다. 태광 에로이카도 큰 딸이 사드렸다.



우리 4남매는 맏이가 오빠, 그 밑으로 딸, 딸, 딸이다. 2대 독자인 오빠 먼저 낳은 덕분에 어머니는 할머니의 재촉을 면하셨다. 순서가 뒤바뀌었으면 어지간히 애를 태우셨을 것이다.

언니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일찌감치 시작했다. 손끝이 야무졌다. 동생들 건사도 잘했다. 잘 먹이고 잘 씻기고 집안일은 뭐든 야무지게 했다. 책을 좋아했다. 교과서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언니가 책을 읽고 있어서 보면 책표지가 달력으로 싸이지 않은 것들이었으니 교과서는 아니었나 보다. 교과서는 매 학기 책 받는 날 달력이나 곰표 밀가루 속포대로 각을 잡아 싸놨었다. 거기다 몇 학년 몇 반 OOO를 큼직하게 썼다.

엄마를 닮아 4남매 중 가장 달리기를 잘하던 나는 육상선수 되는 게 싫었다. 선수생활을 5학년때 딱 1년 하고 인문계 학교를 가야겠다고 선언했다. 그 길로 체육선생님은 연습에 안 나와도 된다고 허락하셨다. 거기엔 나를 예뻐하셨던 5학년 담임 선생님의 입김이 작용한 줄 나중에 알았다.

"그 학생은 공부해도 될 만한 아이예요. 선수생활보다는 그게 나아요."


오빠도 인문계 고등학교에, 동생도 인문계 학교를 가겠다고 하니 가운데 낀 언니는 인문계를 고집할 수 없었다. 면소재지에 있는 상업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했다. 가족 누구도 만류하지 않았다. 그렇게 언니는 여상을 다녔지만 상업학교의 교과목에 흥미를 잃었다. 취업을 해야 하는데 경리직으로 일하기 싫다고 했다. 고3 2학기말에 잠깐 직장생활을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대학진학에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욕심을 낼 수 없었다. 간호조무사양성학원에 등록했다. 일 년 동안 학원을 다니고 실습을 하고 머드축제가 유명한 곳에서 첫 병원 생활을 했다. 나는 방학 때 언니를 보러 갔다. 입원실이 있는 그 병원 빈 병실에서 하루 밤 머물며 언니가 사 주는 돈가스와 쫄면을 먹고 언니가 사주는 새 옷을 얻어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내 여고시절이었다. 언니는 거기서 Y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을 짝사랑했다. 방학이 되어 내려오는 그를 만났고 학기중엔 서울로 편지를 보냈다. 그러다 그가 미국으로 교환학생이 되어 떠났다. 실연의 아픔을 안고 서울로 직장을 옮겼다. 서울로 직장을 옮기니 집에 오기는 더 힘들어졌고 방학이 되어도 나는 언니를 보러 가기가 어려워졌다. 그 대신 예쁜 옷, 좋은 책들을 서울에서 부쳐주었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니는 추석 전날까지 병원 근무를 해야 했고 시골 내려오는 기차 편은 모두 매진이었다. 크게 실망을 했다. 집에 오고 싶은 언니의 간절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내 귓가에 울렸다.  언니가 가져 올 선물 꾸러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근무를 마친 언니는 무작정 서울역으로 나갔다. 호남선, 전라선 기차표를 구하려 오랜 시간 대합실에 머물렀다. 마침내 자정쯤 출발해서 지역에 6시간 만에 도착하는 완행열차의 입석 기차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근무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새 6시간을 덜컹거리며 비좁은 통로에 서서 시골로 내려왔다.

언니가 밤새 기차를 타고 내려온다는 소식에 나는 언니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옆 동네에 있는 기차역으로 달려 나갔다. 이슬이 내 바짓단을 적시고 양말을 신지 않은 발에 물방울로 떨어졌다. 단숨에 달려 도착한 간이역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 언니는 한창 빛나는 20대 초반을 막 벗어나는 나이였다. 절임배추처럼 시들시들한 얼굴로 완행열차에서 언니가 내렸다.

푸른 기운을 뚫고 막 쏟아지기 시작한 햇살이 언니의 눈동자에 비쳤다.

출구를 항해 눈을 찌푸리고 걸어 나오는 언니 입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다정하게 들렸다.


고향, 가족이 있는 집으로 그렇게 언니는 밤길을 뚫고 왔다. 등에는 지친 청춘의 더께가 켜켜이 얹어있었다. 언니의 묵직한 가방을 받아 들고 코스모스 핀 길을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그 때는 추억으로 박제되었다.




30여 년을 훌쩍 넘어 이제 언니는 60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때 하지 못했던 공부를 뒤늦게 하고 지금은 서울 동쪽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내 정서적 엄마였던 우리 언니. 유년의 내 배경엔 언제나 착하기만 했던 우리 언니가 그렇게 조용히 있었다.

옆동네 기차역은 이제 무정차 역이 되었고 언니도 더 이상 완행열차를 타지 않는다. 이번 추석에도 근무로 내려오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하릴없이 시절 소녀가 되어 빛나는 청춘이었던 언니를 추억속에서  만날 수 밖에...



https://youtu.be/Hk4JplHEbjI?si=sV_wUPSUWzIyGI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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