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맞이 오피스 괴담 제9화
장마가 시작되던 7월의 어느 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사무실에는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박 사원만이 홀로 남아 막바지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키보드 소리만이 정적을 깨는 가운데, 갑자기 사무실 한가운데서 '위이잉-!'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박 사원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바로 낡은 복사기에서 나는 것이었다.
'누가 복사기를 켰지?'
박 사원은 주변을 둘러봤지만, 사무실엔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용지함에서 인쇄된 종이가 한 장 미끄러져 나왔다.
박 사원은 불안한 마음으로 복사기에 다가갔다. 종이를 집어 든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종이에는 아무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완벽한 백지였다.
"뭐야... 고장 났나?"
박 사원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나 싶어, 그저 용지 걸림이나 단순한 오작동이라고 생각하며 백지를 구겨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기운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지만,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듯한 희미한 기계음은 밤새도록 그녀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다음날 밤, 박 사원은 다시 야근을 했다. 오늘은 김 팀장과 이 과장이 함께 남아 있어 어제보다는 마음이 놓였다. 새벽 2시, 김 팀장은 이미 퇴근했고, 이 과장만이 홀로 남아서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박 사원은 다시 복사기 옆을 지나다가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윙-! 덜그럭! 덜그럭!'
어제와 똑같은 소리. 복사기가 또 저절로 작동하고 있었다.
박 사원은 어쩐지 이번에는 백지가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복사기 앞으로 다가갔다.
인쇄된 종이가 용지함으로 나왔고, 박 사원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건...?"
종이 위에는 희미한 먹물로 무언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용은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수십 년 된 문서가 물에 젖었다 마른 것처럼 글씨가 번지고 종이 자체가 바래고 삭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과거의 유물을 억지로 복사하려 한 흔적 같았다.
박 사원은 종이의 질감이 너무나도 오래되어 바스러질 것만 같아 불안한 마음에 손을 떨었다.
"박 사원, 뭐해요?"
뒤에서 들려오는 이 과장의 목소리에 박 사원은 화들짝 놀라 종이를 숨겼다.
"아, 아뇨. 그냥 복사기가 또 이상해서...."
"그거 늘 그랬어요. 워낙 낡아서."
이 과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박 사원의 손에 들린 그 낡은 종이 조각은, 단순한 오작동 이상의 불길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했다.
며칠 후, 이제는 이 과장이 이상한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그는 야근 중 복사기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위이잉-! 덜커덩! 덜커덩!'
복사기가 저절로 움직였다. 이 과장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돌아봤다.
인쇄된 종이가 나왔고, 그는 습관적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종이 위에는 희미하지만 섬뜩하게 인쇄된 사람의 얼굴 형상이 떠 있었다.
그 얼굴은 초점이 없고, 공허하며, 마치 깊은 고통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그 얼굴이 이 과장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복사기 안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기시감. 그는 공포에 질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를 내던졌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복사기의 전원 코드를 뽑아버렸다.
다음날 아침, 출근한 이 과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어젯밤 코드를 뽑아버린 복사기가, 다시 전원이 들어와 있었고, 대기 모드에서 희미한 녹색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 후부터 사무실의 밤은 점점 더 기괴한 일들로 채워졌다.
야근 중이던 디자이너는 복사기에서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들이 반복해서 인쇄된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암호 같았고, 특정 날짜와 시간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보고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영업팀의 한 직원은 복사기에서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이 사무실에서 과거에 일했던 듯한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인쇄되어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어떤 날은 복사기에서 불규칙한 박동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인쇄되는 종이에서는 피 냄새 같은 비릿한 냄새가 풍겨 나오기도 했다.
가장 섬뜩한 것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 직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릴 때, 복사기가 있는 방향에서 '흐읍... 흐읍...' 하는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는 증언이었다. 마치 복사기가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김 팀장은 이 모든 것을 직원들의 야근으로 인한 집단 히스테리로 치부했다.
"다들 피곤해서 그래요. 빨리 프로젝트 마무리하고 휴가 좀 다녀와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 수 없는 끈적한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그는 직원들의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이 직접 야근을 자처했다.
금요일 밤, 김 팀장은 홀로 사무실에 남아 다음 주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수정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오직 키보드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밤 11시 50분. 퇴근을 위해 컴퓨터를 끄려던 순간이었다.
'콰아아아 앙-! 드드드드득! 윙이 이이이 잉-!'
복사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굉음이었다.
마치 기계 안에 갇힌 어떤 거대한 존재가 탈출을 시도하는 듯했다.
김 팀장은 본능적으로 공포에 질려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복사기의 용지함에서는 종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검은 먹물이 범벅된 종이들이었다.
김 팀장은 심장이 터질 듯한 공포 속에서 겨우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종이 위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7월 21일 화요일 자정. 김선필 팀장 사망. 사인 심장마비]
"이게 무슨... 개소리야!"
김 팀장은 소스라치게 놀라 종이를 내던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순간, 복사기 액정 화면에 'ERROR from Q'라는 메시지가 깜빡이더니 저절로 전원이 꺼졌다.
"고장 난 복사기 때문에 이 밤에 웬 쌩쑈를 하는 건지..."
말투는 거칠었지만 놀란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
복사기가 꺼지자 사무실은 정적으로 채워졌다.
입술은 바짝 말라 마치 흙이라도 삼킨 기분이었다.
서둘러 사무실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기괴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자정이 되었습니다."
상자에서 울리는 듯한 둔탁한 울림을 동반한 알림, 아니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운 소리였다.
몸의 관절이 굳어버리는 듯한 긴장을 이겨내며 가까스로 몸을 돌려 복사기로 다가섰다.
천천히 복사기에 귀를 대 봤지만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김팀장은 복사기 용지함의 문을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시커먼 용지함 내부가 거의 모습을 드러냈을 무렵, 또다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정이... 조금 지났습니다."
목소리와 함께 기괴한 자세로 용지함 안을 채우고 있던 누군가의 커다랗고 충혈된 눈동자가 김팀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 용지함을 들여다보던 김팀장은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그대로 용지함 속으로 고꾸라지며 엎어졌다.
잠시 버둥거리던 김팀장의 두 다리는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