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있어봐, 심심할 틈이 별로 없어!!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 2리 곰배령 아래 설피마을은 택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 x2 산골이다. 포장된 도로가 있고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깊은 산골이 틀림없다. 가장 가까운 가게는 조침령 고개로 10km를 내려가야 나오는 편의점이다. 마을은 계곡을 따라 곰배령 입구까지 드문드문 길게 늘어선 펜션과 밭농사를 일구는 농가 몇몇이 전부다. 문화시설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이런 사정을 아는 지인들은 내가 아이와 함께 산골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때 걱정을 참 많이 해줬다. 고마운 분들이다. "학교에 가고 낮에 아이들하고 놀 때는 그렇다고 쳐도, 밤에 깜깜해지면 아이는 뭘 하고 너는 또 뭘 하냐... 심심해서 되겠냐?" 이런 물음이다. 아마 산골(농촌) 유학을 준비하는 분들이 많이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할 거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일본어를 배울 생각을 하고 곰배령 설피마을로 들어왔다. 당시 아이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고, 한국어 자막을 띄워놓고 일본어 음성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니 몇몇 일본어 단어가 귀에 들어오는 게 신기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일본어를 배우자는 제안을 했고 딸아이는 흔쾌히 동의를 했다. 그렇지만 모든 게 헛고생. 설피마을에 들어와서 우리는 단 한 차례도 일본어 공부를 한 적이 없다. 심심하다고 느낄만한 자투리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아예 심심하다는 얘기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한 달 정도가 지난 현재 상황으로 보면 해가 진 뒤에 아이는 주로 온라인학습지(아***림)와 학교 숙제를 하는데 보낸다. 학습기를 붙잡고 있는 시간 중 절반 넘게 농땡이를 피우고 있기는 하지만 저녁밥을 먹고 잠잘 때까지는 학교 숙제와 온라인 학습지를 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생태유학 친구들과 담력훈련을 하러 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야생동물 학교에서 박쥐나 반딧불이를 관찰하러 가기도 한다. 마을 체육관인 설피관에 모여서 풋살을 하거나, '플로어 이즈 라바'라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아이들끼리 '진동 노래방'을 열기도 한다.
매주 양양 읍내에 내려가 양양교육도서관에서 아이가 읽을 책을 한 보따리 대출받아 놓는다. 그럼 아이는 책을 본다. 물론 스마트폰도 하고 태블릿도 한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은 1시간으로 사용 시간을 묶어놨고, 태블릿도 40분 정도로 제한한다. 아이도 이 룰에 적응했다. 너무 많이 봤다고 하면 스스로 끄고 책을 보든가 그림을 그린다. 요즘엔 우리 집에 찾아오는 길냥이 '둘째기' 그림 그리기에 빠졌다.
학원 뺑뺑이를 돌지 않아도 아이들의 저녁시간은 항상 충만하다. 재미로 충만하든지, 의미로 충만하든지, 휴식으로 충만하든지, 그도 아니면 농땡이와 뺀질거림으로 충만하든지. 하루가 끝남을 의미하는 저녁 씻기를 그래서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씻을래 숙제할래?"라고 물으면 항상 선택은 "좀 놀다가 숙제하고 씻을래"다.
나는 어떻냐고? 저녁 먹을 밥과 반찬을 만들고 먹이고 설거지하고 숙제 봐주고 씻네 마네 한바탕 실랑이를 펼치면 잠잘 시간이다. 나는 적어도 저녁이 심심하지는 않다. 그럼 낮에 심심하냐고? 아침 걷어 먹이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나면 점심 먹을 시간이다. 점심 대충 먹고 원고 좀 쓰고 이것저것 뭣 좀 하려고 하면 "다녀왔습니다~ 놀다 오겠습니다~" 하고 책가방 던지는 소리가 난다. ㅎㅎ 심심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무위고' 따위는 여기 설피마을에는 없다.
밤에 심심할 걱정 때문에 산골(농촌) 유학을 주저하는 건 타당하지도, 현명하지도,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만일 그런 걱정 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내려놓으시길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