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생활도 여섯 달을 꽉 채웠다. 현실에 매우 매우 충실한 사람들은 "거기 가서 뭐 하냐, 그러다 나중에 애한테 원망 듣는다"라고 힐난했다. 왜 공부 안 시키고 산골 가서 뭐 하고 자빠졌냐는 책망이다. 물론 그분들의 진심을 담아 해 준 걱정이라고 믿기에 별로 마음이 상하진 않는다. 오히려 마음 써주심이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산골생활 취지를 이해하는 분들은 "아빠 혼자 따라가서 아이하고 둘만 지내기 힘들겠네"라고 걱정해 주신다. 이래저래 걱정만 끼치는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이런 분들께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린다.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건 사실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장 보는 게 조금 멀어서 불편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겪을 만하다. 이건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해 오던 일이기 때문에 산골에서 지내나 도시에서 지내나 어차피 했을 일이다. 다만 빈도가 좀 늘었다 뿐이지 타격감은 전혀 크지 않다. 빨래는 가급적 몰아서 하고 설거지도 하루 한 번으로 줄인다. 그래야 살림살이 이외에 원고를 쓰거나 운동을 할 시간이 늘어난다. 진동분교는 전교생이 9명뿐이지만 본교인 기린초등학교에서 영양사님과 조리선생님들이 정성껏 만든 급식을 매일 날라다 주시기 때문에 아이는 매일 학교에서 맛난 점심밥을 먹는다. 이거 정말 꿀이다. 급식 없는 세상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세 아들 도시락 싸셨던 내 어머님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남대천이 동해와 만나는 곳 '남동만곳'에 또 들렀어요. 이날은 제비가 많이 날아다녔습니다.
딸아이는 초4로 이제 만 10세를 꽉 채웠다. 아직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이라, 효녀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수긍할 것 수긍하고 반박할 것 반박하면서 협상을 통해 해법을 찾는다. 갑자기 폭발하거나 하지 않는다. 다만 씻기 싫고 숙제하기 싫어서 최후 순간까지 뺀질거리고 미적대는 성향이 있기는 하지만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정도다. 산골살이 6개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폭발한 적이 없다. 디지털 미디어 시청 시간은 평일 1시간 주말 1시간 30분으로 제한했다. 아직까지는 순순히 잘 따라준다. 스마트폰 때문에 옥신각신 해본 적도 없다.
딸아이와 둘만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서로에 대해 이해가 깊어지는 장점이 매우 크다. 아이의 특성과 사고 구조를 이해하고, 지평이 넓어지는 걸 돕는다. 아이는 아빠의 일상을 보고, 아빠와 대화를 통해 아빠의 사고방식을 접한다. 모르는 걸 물어보면 바로 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답으로 이르는 길을 알려준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현실에 적용되는 현장이라고 할까... 예전에도 안 그랬던 건 아니지만 산골생활 6개월을 지내고 나니 아이와 더 많이 친해진 것 같다.
산골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운동이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물론 이웃집에 훌륭한 이웃들이 있지만 다들 바쁘셔서 뭔가 같이 운동을 하거나 할 처지는 아니다. 내가 즐겨하던 테니스는 일단 곰배령 설피마을에선 불가능하다. 가장 가까운 테니스장은 양양읍내, 또는 기린면 소재지인 현리에 있다. 양쪽 모두 차로 40분 걸린다. 이동 거리가 가장 큰 문제긴 하지만 새로 사람 사귀고 동호회를 뚫고 이런 걸 하기가 너무나도 귀찮다. 부족한 운동은 마을 체육관인 설피관에서 해결한다.
아이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거나 피클볼을 친다. 하다 보면 진동분교 어린이들이 하나둘씩 들어와서 이긴 사람이 계속 치는 떨어지기 대회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2학년 애기들은 자기도 치게 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코트로 난입하기도 한다. 치게 해 주면 홈런 날리기로 변신시키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이들이 다른 놀이를 하러 가서 흥행에 실패하면 줄넘기를 한다. 그런데 이건 무릎이 시큰해서 자주 할 수는 없다. 가장 좋은 운동은 역시 걷기다. 곰배령 주차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40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다. 곰배령 등산이 열리지 않는 월요일과 화요일 오전이 딱 산책하기 좋다. 다른 날 아침엔 등산객을 실은 관광버스가 제법 다녀서 좀 불편하다.
운동부족은 체중 증가로 이어지고 체중이 늘면 허리도 좋지 않다. 그래서 술을 확 줄였다. 야구 보면서 홀짝홀짝 마시던 맥주를 피하고, 가끔 밥 대신 한 병씩 먹었던 막걸리도 피한다. 뭐 혼자 술 마신다고 재밌을 일도 없으니 안 마셔도 그만이다.
밀린 원고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게 이 산골 생활의 유일한 스트레스라면 스트레스다. 자연이 숨 쉬는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를 듣고, 아이가 자연 속에서 커가는 걸 바라본다. 우당탕탕 보다는 정중동에 가까운 산골생활이다. 집 앞에 찾아온 다람쥐를 보고 놀라고, 길냥이가 먹이를 구걸하는 냐옹소리에 놀라고, 어미새가 새끼에게 비행 훈련을 시키는 모습을 보며 놀라는 정도다.
매일 출퇴근하지 않아도 되고, 살림살이를 엄청 싫어하지 않고, 자연과 어린이를 좋아하는 아빠라면 혼자서 아이(들)를 데리고 1년 정도 살러 오는 것도 인생의 굉장한 기쁨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빠 혼자 아이 데리고 살려니 힘들지?>라는 애정 어린 염려에 대한 나의 답변은 <아니 전혀, 아이와 함께 크는 거지 뭐...> 정도로 정리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