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성이 높아진다고
비가 오면 나다니기 어렵다. 억수같이 퍼부으면 아예 나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혹시 나갔다고 하면 우산이고 우비고 필요 없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게 된다. 도시생활하는 성인들 가운데 이런 경험 언제가 마지막인지 가물가물한 사람들 많을 거다. 비가 많이 와도 배는 고프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날개가 젖어도 새들은 먹이를 찾아 빗속을 난다. 그러나 억수같이 퍼부으면 잠시 활동을 멈추고 비를 피한다. 네발짐승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평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비만 오면 나타나는 동물들이 있다. 바닥이 흠뻑 젖을수록 만날 확률이 높아지는 그 동물은 바로 달팽이와 지렁이다. 누군가는 달팽이와 지렁이가 무슨 '동물'이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네발짐승(포유류)만 '동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조류=새', '곤충=벌레'로 알고 있는데, 달팽이와 지렁이 등 연체동물은 아예 개념도에 포함되지도 않는 거다. 그러나 정규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 달팽이와 지렁이도 동물이다. (이건 나중에 기회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해 보겠다.)
달팽이와 지렁이는 왜 비만 오면 기를 쓰고 돌아다닐까? 어릴 적부터 품어 온 의문 중 하나다. 비가 많이 오면 고인 물속에 퉁퉁 불어 터진 지렁이 사체. 흥건히 젖은 길을 건너다가 밟혀서 깨진 달팽이.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았을까 싶기도 하고. 더 빨랐으면 괜찮았을까 싶기도 한 안타까움이 섞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면서도 사실 그때가 지나면 잊히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알아봤다.
역시나 대한민국은 자연생태에 대한 연구와 이를 바탕으로 한 대중 교육에 관한 기반이 너무나 부족하다. 왜 달팽이와 지렁이는 비만 오면 길바닥으로 나오는 건지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콘텐츠는 찾기 어렵다. AI가 추천해 주는 정보는 왠지 믿기 어렵다. 도서관 홈페이지를 통해 책을 검색해 봤다. '달팽이 박사님'이라고 일컫는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가 검색됐다. 달팽이를 오래 연구하신 분이란다. 권오길 교수의 <달팽이는 왜?>라는 어린이용 단행본을 참조했다.
달팽이는 호흡공을 통해 공기를 들이마신 뒤 외투막에 밀집된 모세혈관을 통해 가스 교환을 한다. 원시적인 허파의 형태다. 이 공기 중의 산소가 외투막 내의 모세혈관으로 유입되려면 반드시 외투막으로 이뤄진 빈 공간인 외투강 내의 습도가 높아야만 한다. 이런 달팽이의 특성 탓에 달팽이는 습한 곳을 좋아하고 건조함에 취약하다. 날씨가 건조하면 점액을 분비해 입구를 단단히 막는다. 조그만 호흡공을 열어서 외투강에 공기를 채우고 다시 구멍을 막는다. 그러다가 공기가 다 소모되면 다시 숨구멍을 열어 공기를 채운다.
그러다가 비가 오면 달팽이는 제 세상을 만난다. 건조할 걱정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 오는 날에는 돌아다니는 달팽이를 만나기가 쉽다. 물론 도시 지역에선 달팽이를 흔히 보기는 어렵지만 도심하천으로 나가보면 달팽이를 만나기가 조금 더 쉬워진다. 그렇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달팽이가 잠길 정도로 물이 고이면 호흡에 지장을 받는다. 호흡공이 물로 막혀 버리면 숨을 쉬기가 곤란해지는 것이다. 달팽이가 몸을 숨기고 있던 낙엽 밑이나 돌 아래 작은 구멍에 빗물이 들어차면 달팽이는 숨을 쉬기 위해서라도 기어 나와야 한다.
지렁이에 대해서는 영국 지렁이 협회(The Earthworm Society of Britain)의 설명을 가져와봤다. "지렁이가 비가 올 때 땅 표면으로 올라오는 이유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몇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는 이론은 지렁이가 먹이, 새로운 서식지, 또는 짝을 찾기 위해 땅이 젖었을 때 땅 표면을 더 쉽게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비가 땅에 닿으면 토양 표면에 진동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지렁이가 굴에서 나와 표면으로 나옵니다. 지렁이는 생존을 위해 습한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토양이 젖어 있을 때 표면을 더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새들은 발을 두드려서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흉내 내어 지렁이가 땅 위로 올라와 먹이를 먹도록 유도함으로써 이러한 행동을 이용합니다." 지렁이가 익사를 피하기 위해 땅 위로 올라온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최근에는 지렁이가 꽤 오랫동안 물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 추세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비가 오는 날 달팽이와 지렁이를 만나볼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달팽이와 지렁이는 다른 여러 종류의 동물과 마찬가지로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에라도 도심에서 지렁이와 달팽이를 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행운아다. 생명과 조금이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 더 크다는 뜻일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