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보니 나라가 없었어
시간이 흘러 나는 학교에 가게 되었다. 다 큰 계집애가 집에서 뒹굴거리면 되겠냐는 할머니의 채근과 함께. 나의 첫 학교 입학은 집안 전체가 신경을 쓰는 큰 일이었다. 돈생들도 나를 부러워 하였다. 앞으로 무슨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전혀 예측도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내 이웃에 사는 일본인 부부의 딸, 키무라 사요코도 같은 시기에 일본인 학교에 입학한다고 했다. 사요코는 어릴 적부터 마당에서 그네를 타거나 구슬을 가지고 놀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말을 섞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엄마는 사요코의 부모가 우리 집을 방문할 때면 늘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그들의 집을 방문한다거나 우리 자매들이 사요코와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적이 없다. 우리 집에 그들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그날따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심부름을 보내거나 공연히 쌀독을 뒤엎어 벌레를 찾아내라고 했다. 아버지의 일과 관련한 일본인들이나 이웃의 일본 손님들이 올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특유의 못마땅한 얼굴로 방에 들어가서 연신 ‘엣헴‘을 내뱉었다.
엄마는 외가에서 남자들만 교육을 시켜 배움이 없다고 들었는데, 일어도 유창했고 한글도 잘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는 일본인 선생이 집까지 찾아와서 학업을 잇도록 외할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할 만큼 괜찮은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빨래방망이와 다림질하는 인두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엄마는 밤이 되면 네 자매가 나란히 누워 잠들기 전에 엄마는 ’ 소가 된 게으름뱅이‘, ’ 호랑이와 곶감‘, ’의 좋은 형제‘와 같은 옛날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우리는 엄마를 따라 허공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려가며 누워서 한글을 한 자 한 자 깨쳐갔다.
아버지는 틈 날 때마다 한국의 역사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조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마치 신비한 비밀을 알게 되는 특별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얘들아,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것이었단다.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들이 이 땅을 지키며 살아왔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 것이 아니야. 일본이라는 나라가 와서 빼앗아간 거야."
아버지는 잠시 쉬고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가만히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순자와 혜자는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네"만 연발했다.
"일본은 힘이 세서 남의 나라를 마음대로 차지했단다. 우리 조선도 그렇게 빼앗겼지. 그래서 너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 그게 다 진짜가 아니란다. 그들의 말만 믿으면 안 돼."
아버지는 조용한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강조하였다.
"우리 조선은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이겨냈어. 우리 조상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지. 그러니 너희도 절대 조선을 잊어서는 안 돼. 학교에서 일본의 이야기를 배우더라도, 마음속엔 항상 우리 조선을 기억해라."
아버지는 우리 눈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여덟 개의 까만 누동자가 반짝이며 아버지의 이야기에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조용히 학교에서는 잘 배우되, 너희가 누구인지, 이 땅이 원래 누구의 것인지는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버지는 특히 나에게 다시 강조했다. 학교에 가면 집에서 들은 것들은 모르는 척하고 있으라 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잊으면 안 되는 경험으로 기억하라고 했다. 식인물고기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식인물고기의 실체를 알아야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식인물고기에 빗댄 아버지의 말은 다소 어려웠지만, 나는 일본인이 아니니까 일본식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일본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은 했다.
나는 몸이 약한 탓에 들어가려던 학교를 이듬해 정숙이와 같이 갈 뻔했으나 엄마는 정숙이를 1년 먼저 입학시키기로 하고 언니를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
”뭐, 언니는 공주고 나는 시녀야? “
정숙이는 엄마의 당부가 불만이었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던지 곧 나에게 다가와 학교생활이 어떨까에 대해 들뜬 공상을 해댔다. 나는 그런 정숙이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정숙이는 아버지의 당부를 잊은 것일까? 한편, 나는 속으로 아버지가 걱정했던 그 식인물고기의 교육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입학당시 1944년, 2차 대전 중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며, 연합군이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밤중에 머리맡에서 엄마와 아버지가 소곤댔다.
”곧 전쟁이 끝날 수도 있겠어. 애들 단속 잘하고. “
”네. 그들이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
그렇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다. 탐심으로 가득 찬 덩어리들이 순진한 땅덩이를 넘나들더니 저렇게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주인행세를 한다.
곧 전쟁이 끝날 것 같다는 엄마 아버지의 얘기와는 달리 강제 노동과 일본군의 전쟁 동원이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 자매들을 놀리던 남자애들은 우리보다 나이가 얼마나 더 많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전쟁터에 끌려갔다. 아직 얼굴에 소년기를 벗지 못한 변성기 아이들이었다. 돈 벌러 보내준다는 아저씨들의 꾐에 넘어가 어디론가 끌려간 언니들도 있었다. 국가에 봉사하러 간다는 허울 좋은 강제집행이었다. 그들의 집은 초상집과 같았다. 그렇게 집 떠난 그들의 아들 딸들은 생사가 묘연했다.
언니들 중에 가지라는 착한 언니가 있었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떠나면서 일본 건너가면 공장 다니면서 징병된 오빠를 꼭 찾아가 보겠노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날짜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지언니네 오빠도 가지언니도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딸을 통해 아들의 소식도 듣고 딸의 안녕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견디어 온 가지언니네 부모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흉한 소식에 아들을 빼앗기고 딸마저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 가지언니네 엄마는 점차 정신줄을 놓았다. 가지언니네 엄마는 매일 동구밖에 하염없이 서서 누구를 기다리다가 걸핏하면 해 질 녘에 우리 엄마에게 찾아오곤 했다.
”가지야, 오빠는 만났니? “
그때마다 엄마는 가지가 되었다.
”엄마, 내일 만나기로 했어요. 엄마는 식사하시고 잘 주무시고 계시면 내가 내일 알려 드릴게. “
엄마가 가지 언니네 엄마를 돌려보내 놓고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아버지에게는 밤늦게 찾아오는 남자들에게 돈뭉치를 건네는 일이 더 빈번해졌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뭔가를 빠른 속도로 속삭이고 급하게 떠나곤 했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우리도 곧 이 지긋지긋한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날이 올 거야. 우리 아이들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