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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력 Oct 18. 2024

잊히면 안 되는 이름 - 4화

"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이름을 가지고 있다."

쓸모없는 계집애들의 집단    
 


나와는 달리 정숙이는 건강했고 기운도 셌다. 엄마가 고부라져 일하는 틈을 타 장독대까지 기어가 큰 항아리 틈사이에서 잠드는 바람에 엄마의 애를 태운 적도 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눈 밖에 있을 때마다 그런 정숙이를 아들인양 마실을 데리고 다녔다. 반면, 엄마는 유약한 나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정숙이보다 더 나를 아기 다루듯 챙겼다.      


그러다 셋째 순자가 태어났다. 엄마는 죄인의 삶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어린 생명들의 사랑스러움에 시집살이의 화를 녹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버지가 할머니 다음으로 엄마를 최고로 꼽았다. 표면적 최고인 할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며느리에게서 지키지 못한 듯 하다. 자신이 아들을 며느리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사명을 강조하면서도, 당신이 나서서 그 사명을 적극적으로 훼방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전혀 접근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며느리가 미울까?     


순자는 정말 순한 아이이다. 언니들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넘어지기도 하고 까지기도 하는데, 애가 우는 법이 없다. 정숙이는 반대로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분이 풀릴 때까지 악을 쓰고 울었다. 동네 남자아이들과 다툼이 일어도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이유 없이 괴롭히는 남자아이들로부터 정숙이는 나와 순자를 지켜내었다. 아버지는 정숙이가 사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넷째 혜자가 태어났다. 쓸모없는 계집애들이 이제 내 아래로 셋이나 되었다.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는 이 작고 꼬물거리는 생명체들이 신기하다. 정숙이가 기분에 내킬 때만 언니라고 부르고 항상 너라는 호칭을 쓰지만, 상관없다. 동생들의 존재는 엄마에게 또 나에게 우리 편이었다. 이렇게 할머니에게는 쓸모없는 계집애들의 집단이 생겼다.     


엄마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식솔들의 식사를 챙기고 한시도 손을 놀리지 않고 옷을 짓고 다렸다. 구멍 나거나 찢어진 옷도 감쪽같이 고쳐놓았다. 일곱 식구의 옷은 항상 희게 빛났고 어디를 나가든지 우리 식구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깔끔함이 돋보였다. 걸레 그릇은 엄마의 친구였다 여러 개의 걸레가 담긴 양은그릇을 항상 들고 다니며 오염된 곳은 즉시 처리해 버려야 속 시원한 엄마였다. 마른걸레, 젖은 걸레, 그리고 기름기 닦는 걸레는 따로 있었다. 할머니는 이제 엄마에게 모든 살림을 맡긴 듯했고 우리 어린것들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없을 때만 우리를 아꼈다. 엄마가 집안에 없을 때는 거의 없었다. 다만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한 엄마와 같은 공간에서 떨어져, 우리들끼리 올망졸망 병아리들처럼 마루나 마당에 모여 있을 때가 종종 생긴다. 우리는 돌멩이를 주워 모아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며 놀았다. 새도 만들었고 사람도 만들었다. 늘어놓았던 돌들을 흩어서 다시 다른 모양을 만들기를 반복했다. 잘못해 돌들이 섞이게 되기라도 하면 서로 네거니 내거니 하면서 투닥거렸다.  실컷 놀다가 순자나 혜자 중에 한 사람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울거나, 둘이 같이 울거나, 정숙이가 화가 나서 돌멩이들을 마구 섞어 버리면 아이들이 또 울면서 놀이가 끝나고 나면 어느덧 해질녘이 되곤 했다.  


그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음소리를 비집고 들어온다.

"연임아, 정숙아, 순자야, 혜자야!"


할머니는 우리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할머니에게로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처음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할머니가 무서워 슬금슬금 다가가던 우리들은 곧 할머니의 손끝에 정신이 팔리곤 했다. 신기하게도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할머니의 손은 약과니 뭐니 주전부리를 그녀의 치마폭을 통해 끊임없이 꺼낸다. 주전부리는 주로 끈적하고 달콤한 엿이나 강정 따위였다. 우리는 엄마에게 호통치는 할머니를 미워했지만, 주전부리를 주는 할머니는 좋아했다. 존경했다. 엄마는 늘 우리에게 할머니를 감싸는 말로 예의를 가르쳐 왔는데, 할머니가 간식을 풀어놓는 날이면 엄마의 가르침에 네 자매가  제대로 순종하는 날이 되었다. 우리도 보는 눈이 있어서 할머니가 엄마를 하대하는 부당함을 우리들 가슴깊이 무언으로 공유했고 분노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가 우리에게만 허용하는 귀한 간식들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이 날 만큼은 우리는 쓸모없는 계집애들의 집단이 아닌 사랑스러운 할머니의 손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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