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이름을 가지고 있다.
엄마, 그런 사람이셨소?
1937년 2월.
내 생일이다.
“아니, 첫 애부터 계집애라니? 쫓겨나고 싶은 게야?”
“죄송합니다, 어머니.”
엄마가 이렇게 앳되었나. 우리 큰 딸 나이였구나. 날 낳은 것이 이렇게 고개를 못 들고 쩔쩔 매야 할 일인가? 스무 살 엄마는 산후조리는커녕 시어머니의 저녁상을 준비했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아버지는 아내가 안쓰러우면서도 차려놓은 밥상을 그저 받을 수밖에 없다. 처가에서 거의 팔려오다시피 시집온 아내가 친정에 가지 않을 거란 걸 아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몰래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아범은 뭐 하는가? 저녁 들지 않고.”
“예, 어머님. 먼저 뜨세요.”
할머니는 아버지의 밥 위에 반찬을 올려준다.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하자 엄마는 허둥지둥 나에게 달려와서 젖을 물린다. 나는 젖을 물자 배가 고파졌다. 나는 굶주린 아이처럼 젖을 빨았다. 엄마의 뜨거운 눈물이 내 볼 위로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엄마 품은 따스했고 슬펐다.
할머니가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이랬었구나.
이듬해 여동생이 태어났다. 정숙이었다. 복중의 발길질로 봐서 사내아이라고 잔뜩 기대했던 할머니는 이번에도 엄마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엄마는 죄인 중의 죄인이 되어서 지내야 했다. 할머니 말대로라면 쓸모없는 두 계집아이를 이고 지고 집 안팎의 온갖 고된 일을 도맡은 엄마였다. 아버지는 뭐 하시는 거야? 아무리 시절이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노인네 편에만 서는 게 옳은가 말이다. 시절이 무슨 핑계가 되겠나. 사람이 죽어 나가게 생겼구먼.
정숙이와 나를 재우다 먼저 잠들어버린 얼굴에 아직 솜털이 보송한 엄마가 안쓰럽다. 열아홉에 시집와서 스무 살에 엄마가 되었다. 아버지는 두 번째 결혼이었다. 전처는 시어머니의 아들을 얼른 낳으라는 성화에 요즘말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는지 아이를 갖지도 못하고 친정으로 도망쳤다. 그 집에서는 딸의 안녕을 먼저 걱정했고 아버지의 집과는 인연을 끊었다. 동네사람들이 흉을 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쌀 수십 가 마니를 빼앗듯이 아버지로부터 챙기고 입 하나 덜자고 딸을 줘 버리기까지 하는 집과는 비교가 참 많이 되는 당시엔 특이한 집이었다.
엄마는 늘 그러했듯, 새벽이 오기 무섭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나와 정숙이가 아직 잠들어 있는 사이, 엄마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아침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나마 집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지만, 엄마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중에 유일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때였다. 부엌에서 나는 쌀 씻는 소리와 나무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집안에 울렸다.
“어머니, 기침하셨어요? 제가 거의 다 했으니 좀 더 주무셔요.”
엄마는 조심스럽게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당연하다는 듯이 홱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아침상을 차려놓고도 엄마는 부엌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식사를 하는 동안 엄마는 그 모습에 안정감을 느끼며 솥에 그을린 검댕이를 지푸라기로 문대고 있었다. 가끔 아버지가 엄마를 힐끔 보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무 말도 없이 식사가 끝났다. 할머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범, 오늘 비상소집 있다고 하지 않았나? 수고가 많겠구먼. 시간 늦겠네. 서두르시게나.”
할머니는 아버지를 재촉했다. 지역유지로서 소방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할머니는 마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1930년 대 정규 소방관은 일제강점기 하의 조선에서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았으며, 그 체계는 일본식 소방 조직을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정규 소방관은 주로 도시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시골에서는 정규 소방관이 드물었고, 자발적인 지역 방화단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아버지와 같이 소방관 활동을 맡았던 시골마을 유지들은 일반적으로 농업이나 상업, 또는 지역 행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방 활동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회적 신망을 받고 있었으며, 마을 내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마을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대개 비교적 큰 땅을 가지고 있거나, 마을 주민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들로, 자신의 농장이나 상점을 관리하면서 필요할 때 소방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마을의 방화단이나 치안 유지 활동을 주도했다. 필요할 때마다 방화단을 조직해 화재를 진압하거나, 공공의 안전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마디로 시골동네 소방 활동은 이들의 주된 업무는 아니어서 평소에는 자신의 일상적인 생업에 종사하다가, 긴급 상황 시 소집되어 화재 진압 등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는데 오늘이 그 날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아버지와 할머니의 아침상을 치우고 아버지를 대문 앞까지 배웅하고 나면, 다시 우리 방으로 돌아와 나와 정숙이를 살폈다. 그때쯤이면 정숙이는 이제 막 울먹이며 울음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잠에서 깨서도 가만히 누워 엄마가 돌아오는 소리를 기다렸다. 엄마는 힘들었겠지만 우리에게만큼은 언제나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일어났니? 내 새끼들."
엄마가 웃었다.
엄마는 나와 정숙이를 챙긴 뒤에야 비로소 본인의 끼니를 챙겼다. 그러나 엄마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바쁘게 우리를 돌보고 다시 집안일로 돌아가느라, 엄마의 식사는 언제나 짧고 소리 없이 끝났다.
집 안팎을 다 돌봐야 하는 엄마의 일은 끝이 없었다. 할머니가 불만을 제기할까 봐 엄마는 매일 더 많은 일을 스스로 떠맡았고, 그러면서도 한 번도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종종 “계집애를 둘이나 낳았으니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라고 혼잣말처럼 내뱉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그 말을 들었어도 못 들은 체했다. 아버지도 그런 할머니의 말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냥 넘어갔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가 엄마를 더욱 고립시켰을 만도 한데, 엄마는 아버지가 그렇게 가만히 있어주기를 원했다. 엄마는 아침부터 밤중까지 할머니의 질책을 받으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엄마는 예뻤고 바느질이면 바느질, 요리면 요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웃 사람들은 엄마를 ‘작은 마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이 많았다. 이웃집 일본인 부부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은 엄마를 신뢰했고, 때로는 우리 집을 방문해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할머니는 이런 상황을 몹시 싫어했다. 일본인 부부가 우리 집에 찾아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그들이 엄마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에도 불쾌해했다. "저것들이 뭐라고 우리 집을 자꾸 드나들어?" 할머니는 이따금 엄마에게 그렇게 따지곤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 엄마는 마당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정숙이는 그 옆에서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장난을 치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엄마는 왜 이렇게 항상 조용하고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걸까? 바느질을 잠깐 멈추고 우리에게 싱긋 웃는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는 다짐했다.
'내가 커서 엄마를 지켜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