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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 Dec 14. 2019

결국 '퇴사'했다..

결국 퇴사했다. 12월 8일까지 근무하면서 만 2년을 채웠다. 출근 마지막 날, 선배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대강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아무도 시키진 않았지만 종일 해왔던 일을 묵묵히 마쳤다. 마치 익은 사과를 맛볼 수는 없지만 지구 최후의 날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이 이런 기분일까.

오래 쓴 노트북에 꽤나 정이 든 모양이다. 막상 포맷하려니 아쉬움이 앞섰다.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결국 나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이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마지막 순간이 실감이 났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냥 시원하기만 한 일은 세상에 없는 듯, 지금껏 낡고 지겹게 느껴졌던 공간이 퍽 낯설었다. 저녁이 되고 6시 반으로 예정된 회식에 앞서 책상을 정리하고 회사에서 지급받은 노트북을 포맷(format)했다. 노트북으로 처음 작성했던 오래된 파일과 책상 한편에 첩첩이 쌓여있던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줄곧 입사했던 2년 전 겨울과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쌓인 서류만큼이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딱 그만큼 더 살았고 그 과정만큼 즐거웠으며 고통스러웠다.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보면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퇴사를 생각할 즈음은 정신적으로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미래를 고민하고 일에, 사람에 치이면서 넘쳐났던 열정도 꿈에 대한 갈망도 많이 소진된, 흔히 말하는 번아웃(burn out) 상태였다고 할까. 특히 사회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가 되면서 경제활동을 영위할수록 사회와 인간에 대한 실망이 커지는 듯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름답게 포장했지만 결국 인간이란 동물은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위선된 행동을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페르소나라는 사회적 가면을 통해 자신을 숨기고 누가 더 사회·문화 속 오랜 관습과 통념에 자신을 잘 재단하는지가 그것일 터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는 순수한 이상을 갈망하던 주인공이 인간의 위선과 잔인함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회 속에 스며들고자 노력했던 주인공은(실제로 요조는 최후까지 ‘익살’이라는 무기를 통해 가족과 사회에서 관계를 이어가고자 노력한다) 결국 인간사회에서 철저히 파멸되고 인간 실격자로서 고통받는다. 단순한 소설 속 이야기 같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느끼는 것은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나를 포함한 사회의 허례, 허식 그리고 위선을 비롯한 잔혹함을 알아가는 과정이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텨가는 숭고한 의식이 아닐까. 사는 게 고난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하루 삶을 더 연장해가는 것 자체만으로 미약한 인간의 성장이며 인류에 대한 스스로의 구원일 것이다.    
 
6시 반, 회식장소로 향했다.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회식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가 회식 자체를 싫어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사실 나는 회식을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좋은 사람들과 편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회사 조직 내에서 나이가 어린 막내에게 회식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날도 다르지 않았다. 회장을 필두로 일하면서 회사 내에서 거의 말을 섞어 본 적 없는 임원들이 회식에 다수 참석했고 나에게 소주를 한잔씩 주며 “퇴사해서 아쉽다. 고생했다”고 했다. 나도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답하며 도로 술을 따라줬다. 얼추 취기가 오르자 이들의 얼굴, 아니 더 정확히는 표정이 보였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다들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곧 내가 머물던 자리에 새 사람이 들어오고 새로운 에너지, 신선한 분위기로 다시 조직은 흘러가겠지. 뭣 하나 기다려주지 않고 인생이 그렇게 덧없이 흘러가듯 나도 이제 이곳을 놓아줘야 할 때인 듯했다. 그저 먼 훗날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했던 이가 여기 존재했다고 기억되는 것만으로 족하다.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서울의 금요일 밤, 붐비는 지하철 속에서 나는 예정에 없이 울적해졌고 이와 별개로 또다시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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