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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선생 Mar 15. 2022

동백꽃

문학과 아이들

 

계집애가 나물을 캐러 가면 갔지 남 울타리 엮는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 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고 긴치 않은 수작을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도 저와 나는 이야기도 잘 않고 서로 만나도 본척만척하고 이렇게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로 갑작스레 대견해졌음은 웬일인가. 항차 망아지만 한 계집애가 남 일하는 놈 보고......
"너 일하기 좋니?"
또는
"한여름이나 되거던 하지 벌써 울타리를 하니?"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댄다.  

 

 

"점순이는 왜 갑자기 와서 말을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맞히는 아이들은 놀랍게도 '여학생'들이다. 관심이 있어서 흥미가 있어서 말을 건다는 사실을 남자애들은 잘 파악하지 못한다. 뒤이어 이어지는 장면은 한국 성인이라면 너무도 익숙한 그 문제의 '감자'가 등장한다. 점순이가 은밀하게 건네는 감자.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먹으라는 말까지 붙인 점순이의 행동까지 보고 아이들에게 다시 묻는다. 점순이는 왜 나에게 감자를 주었을까? 그럼 또 답은 여학생들만 안다. 중학교 남자아이들은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동백꽃의 '나'와 똑같은 눈을 하고 놀란다.  "너희가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안 생기는 거야!" 하고 내가 놀리는 건 덤이다.  

 

한국인에게 너무 익숙한 작품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설 '동백꽃'. 중학교 1~2학년 아이들이 주로 이 작품을 보게 되는데, 매년 반복되는 수업 속에서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소설의 주인공 '나'가 '점순이'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장면. 괜히 일하는 '나'의 곁을 알짱거리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품에 숨겨온 감자를 주는 '점순이'의 의도.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시기이거나,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남학생들은 정말이지 점순이의 맘을 모른다. 점순이가 관심이 있으니 와서 말을 건 것이고, 좋아하니까 감자를 건넨 거라는 사실에 뒤늦게 '아~'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재미있는 것은 간혹 점순이의 맘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남학생들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국어 우등생'이 아니라 '연애'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또 학생들을 가볍게 놀린다. "여자 친구를 만들고 싶으면 이렇게 눈치를 챙겨야 하는 거야~!" 그러면 아이들은 한바탕 웃으면서 수업은 부드럽게 이어진다. 반복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김유정 작가가 그린 '나'는 어쩜 바로 내 앞에 있는 이 순진한 꼬마 녀석들은 아닐까 생각하고는 한다.

 

학원에서도 '동백꽃'같은 상황이 있었다. '민'이는 꽤나 똘똘하고 성실한 남학생이었다. 깔끔한 성격으로 항상 차림이 단정했고, 중간키에 피부가 뽀얀 편이라서 또래 남학생들보다 살짝 어려 보이는 아이였다. '민'이의 세 살 터울 여동생인 '유'의 증언으로는 집에서는 꽤나 여동생을 못살게 구는 보통의 오빠인 듯싶었지만, 밖에서 보이는 '민'이는 차분하고 얌전한 모범생이었다. 여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매너가 좋아서 여학생들이 불편해하지 않는 아이였다. (장난이 심한 남학생들을 중학교 여자아이들은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은근히 '민'이가 인기가 좋았다. 그중에서 특히 한 학년 후배인 '희'가 열렬한 애정을 보였다.  


시작은 시험 기간 보충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학년 아이들이 한 강의실에 있게 되면서부터 였다. '희'는 시험 기간 동안 같은 교실에서 마주하게 된 '민'이를 보고 홀딱 반한 눈치였다. 그 오빠의 이름은 무엇인지, 몇 학년이고 어느 학교인지 물었고, 친한 친구들 앞에서는 노골적으로 잘생겼다고 떠들어댔다. 애석하게도 다른 여학생들은 '잘생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희'의 편이 되어준 것은 선생님들이었는데, '민'이면 훌륭한 외모라고 동조해주고 맞장구를 열심히 쳐줬다. 괜히 '민'이가 공부하는 강의실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말을 걸기 위해 애쓰는 '희'였지만, 애석하게도 '민'이는 전형적인 이과 모범생 타입인지라 쉬는 시간에 주로 친구들과 과학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하루는 '민'이의 자리에 누가 젤리 한 봉지와 함께 "공부 열심히 하세요."라는 메모를 붙여 놨다. 그날 선생님들 모두가 교무실에서 빵 터져서 웃었다. 보나 마나 '희'가 민이에게 준 선물이었다. 똑같은 종류의 젤리를 '희'가 같은 반 친구들과 나눠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애석하게도 그 젤리는 '민'이 반의 수업이 다 끝나고 텅 빈 교실에 남겨져 있었다. '민'이는 그 젤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앞 수업이 있던 친구가 놓고 간 물건이라고 생각한 듯 고스란히 놔두고 가버렸다. 결국 그다음 날 그 젤리를 '민'이 손에 직접 전해 주어야만 했다. 한 학년 동생이 너 주라고 사 온 것이었다는 말까지 해줬는데, 그때 '민'이의 반응이란... "네? 왜요?" 멀뚱멀뚱 거리는 것이 딱 동백꽃의 '나'와 같았다. '희'의 애정공세는 젤리가 끝은 아니었다. '민'이의 여동생이 '유'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 동생마저 귀엽고 예쁘다며 칭찬을 대놓고 했고, '유'에겐 이유 없이 친절한 중학교 언니가 생겼다. 우리는 돌려서 '민'이에게 네 동생인 '유'를 예뻐하는 아이가 있음을 알렸지만, '민'이는 그저 제 눈에 못난이인 동생을 흉보는데 앞장서기만 했다. 서로를 비방하는 남매를 보니 친남매는 확실했지만, 왜 '희'가 '유'에게 잘해주고 예뻐하는지는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고백이야 당사자가 하는 것이니 다들 그 이상의 어떤 말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희'의 짝사랑은 반년 정도 계속되다가 끝이 났다. '민'이는 약 5년을 지도했는데, 생각을 해보니 동백꽃을 가르칠 때 그 아이도 그게 왜 점순이의 애정표현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인기가 있음에도 여자 친구가 안 생기지 싶지만 말이다. ^^)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다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터 안 그럴터냐?"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터니.”

 

"점순이는 뭘 하지 말라는 걸까?"

 

내 질문에 중학생 '민'이는 멀뚱히 나만 봤었다. 상위권의 성적이 나오면서도 국어 특히 문학수업은 늘 힘들어하는 '민'이라서, 나는 가끔 녀석에게 연애를 좀 하라고 외쳐주고 싶기도 했었다.  '사랑'을 알면 '문학'을 모르기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맘때의 중학교 남학생들은 '점순이'의 말 뜻 잘 모른다. 답은 언제나 여학생들이 정확하다. 간혹 또래 중에 연애경험이 좀 있는 남학생이 아주 명확하게 답을 내놓는다. 그러면 우습게도 주변의 남학생들은 그것이 정답이 아닐 거라는 의심까지 한다. 답답한 녀석들이라고 내가 놀리고는 하지만, 정말 그 순진한 얼굴로 답을 맞힌 친구를 신기해하는 것을 보면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시간이 흘러 그 순진한 꼬마들에게도 '정신이 고만 아찔해'지는 순간이 와서 진정으로 '동백꽃'을 이해하고 웃는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좀 어수룩하게 '점순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그래야 내가 녀석들을 조금이라도 더 놀려먹으며 즐거울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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