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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선생 Sep 15. 2022

미련한 로미오

사춘기 로맨스

'로미오와 줄리엣'

가문의 싸움 때문에 비극적으로 끝을 맺은 남녀의 사랑이야기. 아마 대부분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서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게 너무 당연하게 아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살다가, 몇 년 전에 제대로 원작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로미오는... 사춘기 청소년이라는 것이다. 맙소사. 그 나이대 아이들을 지도하는 선생 된 입장으로 삐딱하게 보니 "세상에 이 미련한 로미오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작품을 왜곡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웃자고 하는 소리다.


내가 학교 다닐 때, 나도 그랬고 내 친구들도 그랬고 '사랑'은 너무 중요한 이야기였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믿을 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아니 나이가 아무리 들어가도 사람들에게서 '사랑'은 중요한 화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만 어른들의 사랑은 아이들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그 시절을 지나온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어린 나이처럼 순수하게 뜨거운 사랑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 그러니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런 엄청난 사랑을 했지.


중고교 시절에 연애를 나라고 안 했던 것은 아니다. 그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촌형제들이 나의 이성교제 사실을 어른들이 알면 안 되는 은밀한 비밀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이성교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이 좀 더 강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건전한 만남만 유지한다면 크게 상관하지 않으셨는데,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내내 연애도 했고 학교 생활도 잘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청소년 이성교제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끔, 선생 입장에서 정말이지 미련 맞은 로미오 같은 녀석들이 있는 게 문제다.


K는 중학교 시절 내내 우등생에 속했다. 중학교 3년 동안 지각, 결석이라는 것도 몰랐고, 숙제를 안 하는 일 같은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할 때, 그 학년에서 K가 가장 촉망받는 학생일 정도였다. 예상대로 K의 고등학교 첫 시험은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전과 달리 K가 종종 지각하는 일이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된 기가 막힌 사실은 K가 여자 친구의 학원을 데려다주고 오다 보니 늦는다는 것이었다. 와중에 다행이다 싶었던 것은 그 여자 친구의 부모님이 학업에 소홀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신 거였지만, K의 지각 습관은 갈수록 잦아졌다. 듣기론 학원이 끝나면 곧장 여자 친구를 또 데리러 가는 듯했다. 시간에 칼 같던 K가 변하면서 K의 성적도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련한 로미오 녀석은 떨어진 성적과 함께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여자 친구도 성적도 떨어지면서 문제가 생긴 듯했다.)


성실하고 학업 욕심도 있어서 기대를 받던 Y가 얼마 전 학원을 그만두었다. 교무 실장으로 학원생의 유지관리도 챙겨야 하기 때문에 혹여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는지 학부모께 연락을 드렸다. 학원에 대한 어떤 불만도 불화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님은 그저 Y가 나가지 않겠다고 하니, 워낙 자기 일을 알아서 잘하는 Y를 믿고 내린 결정이셨다. Y가 말한 퇴원 사유는 혼자 해보겠다는 것였지만, 같은 반 친구들에게 들은 사연은 조금 달랐다. 얼마 전부터 Y에게 관심을 보인 여학생이 있었고, 최근 Y가 그 여학생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Y가 학원을 그만둔 바로 그 주 주말, Y는 그 여학생과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다. 참고로 우리 학원은 시험 기간엔 주말에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다섯 시간 정도의 보충이 잡힌다. 결국 Y는 우리 학원을 그만두고 일주일 만에 그 여학생과 연애를 시작했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학습에 문제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친구들에게 학원에 다시 가고 싶다고 말했단다. 그러나 이 미련한 로미오는 본인이 부모님께 내뱉은 말이 있어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미련한 로미오의 사연이 저 둘이 끝이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무척 많다. 타 지역으로 전학을 간 여자 친구를 만나려고 학원을 빼먹은 녀석, 학원 내에서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자 학원을 관둔 녀석, 밤새 화가 난 여자 친구를 달래 주느라 잠도 못 자고 숙제도 못한 녀석, 혼자 공부하겠다고 부모님께 말하고 학원을 관두고는 여자 친구와 스터디룸으로 놀러 다니다가 결국 성적이 곤두박질쳐서 부모님께서 강제로 끌고 온 사연까지. 사춘기 자녀의 연애를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해서 하소연하는 어머님들도 보고, 그 문제로 부모님과 갈등의 골만 깊어지는 경우도 종종 본다. 사실 어른들은 본인이 할 일도 좀 해가면서 연애했으면 하는 건데 이 미련 맞은 녀석들은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내던진다. 남자아이들에 국한된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내 경험상으로 남학생들이 그런 경우가 더 많기는 하지만 여학생들도 더러 그런다.


여학생 L은 남학생 J의 여자 친구가 되면서 우리 학원에 왔다. J는 매일 L을 챙겨서 학원에 왔고, 주말 보충도 함께 하면서 꽤 잘 다녔었다. L이 가끔 건강 문제로 결석을 하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수업 태도가 나쁜 것은 아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 겨울 방학이 되고, L의 지각과 결석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J는 전혀 문제없이 학원에 오고 있던 중이라서 의아하게 생각하고 알아보니, 두 사람이 헤어진 무렵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새 학기. L은 학원을 거의 절반만 나오다시피 하고, 주말에 있는 보충은 아예 나오지를 않았다. 아이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L이 최근 어울리는 남학생들이 생겼는데, 문제는 그 아이들이 소위 좀 노는 애들이라고 했다. 결국 L은 그 학기를 다 마무리하지 못하고 학원을 그만두었다. 모범생이었던 J와 만날 때는 덩달아 모범생이었던 L은 그렇게 남자 친구가 바뀌면서 소위 좀 노는 그룹의 일원이 되고 변해버렸다.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이래서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이 청소년 이성교제에 그렇게 부정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공부나 입시보다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순간적인 감정에 앞서서 서투른 판단을 하는 미련한 로미오가 되지는 않길 바란다는 것이다. 만일 로미오가 조금만 더 침착하게 상황을 알아볼 기회가 있었다면, 로미오는 깨어난 줄리엣과 만나서 둘의 사랑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더 앞서서 로미오가 티볼트를 죽이는 참담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사랑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련한 로미오의 서툰 판단들이 결국 이 모든 사랑을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로미오의 첫사랑은 줄리엣이 아니다. 로미오는 이전에 이미 자신의 정열을 쏟았던 여인이 있었지만, 줄리엣을 보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더 뜨겁게 타올랐다. 지금 눈앞에 그 뜨거운 사랑이 과연 진짜 줄리엣인지 녀석들은 생각이나 해봤을까?


미련하게 기존의 자신을 버려가면서 하는 연애가 어른의 시각에서 안타까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물론 모두가 미련 맞은 연애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S와 B가 그랬다. 여학생 S의 반에 같은 학교 남학생 B가 새로 왔었다. B는 두어 달 학원을 다니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야 S와 B가 연애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B가 S를 따라온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S는 오랫동안 우리 학원에 다녀서 우리와 잘 맞았고, B는 두어 달 만에 자신과 우리들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옮긴 것뿐이다. (우리 입장에선 아쉬웠어도,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해서 맞지도 않는 자리에 있는 것보다는 현명했다.) 그 후, 두 사람은 고등학교 3년 동안 꾸준하게 연애를 했다. 그러면서 S의 학업 성취는 나빠진 적이 없었다. 그건 B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목표한 대학에 진학했고, 여전히 S의 카톡 프로필엔 B와의 다정한 사진이 있다.  


그 나이의 사랑이 삶에 매우 중요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내 사촌 오빠는 중학교 때 만난 여자 친구와 십 년을 넘게 연애를 하고,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고 단란하게 잘 살고 있다. 오빠 부부를 보면, 삶에서 이런 완벽한 사랑을 만나는 것이 학업적 성취보다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저 아이들이 미련하게 사랑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우리 문학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었다. 사랑을 할 때, 두 손을 다 쓰지는 말라고 말이다. 한 손으로는 본인의 삶을 챙기고, 다른 한 손만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있으라고 말이다. 뜨거운 사춘기의 사랑을 비극적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의 사랑이 시련을 이겨내고 고통을 인내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룬 이몽룡과 춘향이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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