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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23. 2021

내 고통이 보이나요?

[그림이 던지는 질문들-3] 에두바르드 뭉크

The Scream(1893), 오슬로 국립미술관

너무도 유명한 그림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 그림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임에 틀림없습니다. 음산한 분위기와 공포에 떠는 사람의 모습이 굉장히 솔직합니다. 다소 충격적인 몰골을 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애잔하면서도 끌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모습을 대입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요?

뭉크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날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 친구들과 산책을 하던 뭉크는 갑자기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저녁 노을이 핏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였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자연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에게서 뒤쳐져 혼자서 불안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귀를 틀어막고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 그림 속 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지만 뭉크의 말대로 비명은 밖에서 들려오는 것입니다. 물론 뭉크에게만 들리는 것이었겠죠. 두 친구는 아무 상관없이 갈 길을 가고 있으니까요. 남자가 있는 다리 위는 깎아지를 듯한 원근법을 사용하여 주변의 모든 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지고 남자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무력해보입니다. 남자의 불안과 공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뭉크는 비극적인 가정사가 있었습니다. 다섯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돌아가셨고 열네살 때 가장 좋아하던 누이 또한 결핵으로 죽었죠. 그 뒤에도 계속해서 아버지의 죽음, 남동생의 죽음을 겪었고 여동생 하나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뭉크 또한 폐가 좋지 않아 언제나 병약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광신도적 경향이 있어 공포와 억압이 집안 분위기를 짓눌렀습니다. 뭉크 스스로 말했듯이 자신의 인생은 병과 광기,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것이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통, 불안, 우울, 무의미, 사랑, 질투, 외로움, 죽음은 그의 삶과 뗄 수 없는 요소들이었죠. 이러한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뭉크는 당시의 자연주의적, 인상주의적 표현 방식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자연스럽게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비롯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 다양한 실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파리에 머물면서 고갱, 고흐, 세잔,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에 영향을 받았고 베를린에 머물면서 상징주의적 움직임에 동참하면서 그의 그림은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사상적으로도 젊은 시절 경도된 보헤미아니즘으로 자유분방하고 허무적이며 반체제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그림에는 다소 폭력적이면서도 과장적인 표현 방식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단순하고 거친 붓질과 곳곳을 비워둔 그의 그림은 마치 그리다 만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비평가나 대중의 호응을 얻기 어려운 부분이었죠. 

하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높아졌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뭉크 자신의 삶은 내면의 고통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고 이는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우르르 뿜어내듯 캔버스에 쏟아낸 그의 감정은 과격하고 거칠기는 하지만 날 것 그대로의 강렬함이 있었습니다. 




분명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감정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과 닿아있었습니다. 혼자 느끼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자신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고통을 형체와 색이 있는 실체로 마주하면서 일종의 충격을 느끼는 것일까요. 어쩌면 거부하고 싶고 피하고 싶고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기에 더욱 강렬하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뭉크가 표현한 고통과 외로움은 캔버스 안에서는 나누어지지 않고 철저히 혼자만의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캔버스 밖의 사람들과는 활발히 교류가 이루어지는 느낌입니다. 즉, 뭉크가 느끼는 감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는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설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일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순간 모두에게 공유가 되었고 공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고통이 보이자 비로소 나누어진 셈입니다.  

병실의 죽음(1895), 오슬로 국립미술관

뭉크의 그림 'Death in the Sickroom'(1895)을 보세요. 어릴 때 자신의 누이가 죽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전면에는 자신을 비롯해 두 누이가 보입니다. 왼편 벽에 선 이는 남동생이겠죠. 침대 옆 의자에는 죽어가는 누이가 앉아 있고 아버지와 숙모가 그 옆을 지키고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건은 과거지만 자신을 포함해 두 누이와 남동생은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림을 그린 당시의 모습일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들은 슬픔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같이 모여 있지만 각자 다른 곳을 보며 혼자서 슬픔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누이의 죽음은 분명 가족 모두에게 큰 슬픔과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 고통은 실체가 없으며 정해진 분량도 없습니다. 따라서 결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가족은 고통의 무게를 각자 짊어지고 있습니다. 온전히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 순간 고통의 무게를 분담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나중에라도 최소한 표현을 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것을 안에만 가두고 있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입니다. 다행히 뭉크는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고 또한 전시를 통해 사람들과 나누었지요. 

어쩌면 뭉크는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일종의 치유를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결핵을 앓으며 병약했고 신경쇠약 등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으며 1918년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에 걸리기도 했지만 뭉크는 살아남았습니다. 80세 생일을 맞고 한 달 뒤 숨을 거둔 뭉크는 그의 가족 중 막내 누이와 더불어 이례적으로 장수를 누렸습니다. 

뭉크가 유난히 자신의 작품을 아꼈다는 사실 또한 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기록한 그의 그림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충실히 담아낸 것이기에 일종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그림을 '자식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그림이 팔리면 그 그림을 다시 그려 자신의 스튜디오에 계속해서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목판화, 동판화 등 그래픽 아트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러한 이유가 한 몫 했습니다. 물론 실험적인 이유나 그림의 대중화를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이 완성한 그림을 여러 개 만들어두기 위한 것이었죠. 그렇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림들을 자신의 곁에 두고 뭉크는 스스로 견디었던가 봅니다.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1940-43), 뭉크 뮤지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 있었던 뭉크, 고통도 슬픔도 아픔도 불안도 공포도 모두 홀로 감당하면서 끝까지 싸워나간 그는 자신의 말년의 자화상에서 비로소 홀가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밝은 노란빛의 벽면과 알록달록 빗금이 그려진 침대보는 경쾌한 느낌마저 드네요. 젊은 시절 자화상에서 보여온 어둡고 우울하며 심란한 모습과는 달리 단호하면서도 한결 편안한 모습입니다. 시계와 침대 사이에 서 있는 뭉크의 구부정하지만 정정한 모습은 마치 모든 준비를 마친 듯합니다. 오른쪽으로 열린 문은 죽음을 향하는 것이겠죠. 그토록 죽음에 억눌리며 살아왔던 뭉크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듯합니다. 그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했던 삶을 마무리하면서 더 이상 미련은 없는가 봅니다. 그의 고통이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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