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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23. 2021

당신은 얼마나 절실한가요?

[그림이 던지는 질문들-2] 오귀스트 로댕

(좌) '기도'(1909, 스탠포드대학 로댕조각공원 / (우) '추락하는 남자의 몸통'(1882-1889), 스탠포드대학 로댕조각공원

여기 두 개의 조각이 있습니다. 한 개는 몸의 모든 근육이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 꿈틀대는 남자의 몸통이고 다른 한 개는 부드럽고 조용하지만 몸에 힘이 가득 들어가 있는 여자의 몸입니다. 이 두 사람의 몸은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요.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힌트를 얻기 위해 조각의 제목을 들여다봅니다. 남자의 몸통 조각 제목은 '추락하는 남자의 몸통(The Torso of Falling Man)'이고 여자의 몸 조각 제목은 '기도(The Prayer)'입니다. 이 둘은 모두 로댕의 작품이지만 두 작품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추락하는 남자의 몸통'은 '지옥의 문'에서 세 번 등장하는 '추락하는 남자'의 몸통만을 따온 것이고 '기도'는 원래부터 몸 부분만으로 만들어진 조각입니다.

하지만 두 조각에서 왠지 모를 연결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둘은 모두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나 할까요. 즉, 남자의 몸통은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 그 고통과 절망에서 빠져나오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고 여자의 몸은 살아있는 순간에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의 마음을 담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로댕은 후반으로 갈수록 이미 만들어진 몸 전체의 부분들을 나누어 각 신체를 독립적으로 제작하거나 다시 다른 부분들과 이어붙이는 방식을 취하며 다양한 실험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처음부터 전체가 아닌 몸통, 손, 머리 등 신체의 부분을 따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도'처럼 말이죠. 

이는 굉장히 표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접근방법이었습니다. 로댕의 조각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 또는 르네상스 조각과는 달리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기 보다는 생명이 꿈틀대는 역동성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로댕 초기의 작품인 '청동의 시대'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본 떠서 만든 것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습니다.


이후 로댕은 이러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실제 사람보다 작거나 큰 조각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크기 뿐이 아니었습니다. 후기로 갈수록 로댕의 표현력은 점차 과감해지고 극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실제 사람의 몸과 얼마나 일치하느냐, 즉 사실적이냐를 떠나 인간의 감정과 상태를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변형과 왜곡을 가하기도 합니다. 

손이나 발의 크기를 키운다든지, 팔과 다리, 몸통을 비튼다든지, 머리를 과도하게 젖히거나 숙이거나 옆으로 뉘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몸에 잔뜩 힘을 준 것처럼 모든 근육을 하나하나 살려 불끈 솟아오르게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였습니다. 그의 조각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얼마나 몸의 근육을 방치한 채 온전히 알차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로댕은 신체의 부분만으로 완성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신의 손'을 비롯해 위에 언급한 조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에 로댕은 극적인 표현을 위해 머리(얼굴 표정)보다는 주로 몸의 동작이나 자세를 강조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실험의 시작은 가장 덜 적극적으로 활용된 머리를 떼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강렬한 표현을 위해 그리도 강조했던 손과 팔마저 떼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 얼마나 도전적인 자세인가요? 그러다 급기야는 다리와 발까지 떼고 거의 몸통만 남겼던 것이죠. 마치 머리, 손, 발은 거추장스러울 뿐이고 몸통만으로 족하다는 듯이 불가능해보이는 과감한 실험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로댕은 몸통을 표현하는 데 있어 근육 하나, 힘줄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힘과 긴장을 몸 안에 팽팽히 담아두었습니다. 신체의 부분만을 취함으로써 최소한의 절제된 형태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신체의 한 부분만으로 모든 것을 전달해야 하기에 각 요소들을 하나하나 살려내야 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 결과는 놀랍게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위의 두 조각처럼 말입니다. 




'지옥의 문'에 포함되어 있는 '추락하는 남자'는 어딘가에 걸쳐져 있거나 매달려 있거나 또는 무언가를 붙잡고 있거나 합니다. 마치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지금 지옥불로 떨어지기 직전입니다. 

'추락하는 남자'(1882), 수마야 뮤지엄

반면 '지옥의 문'에서 떨어져나온 독립된 조각을 봅시다. 따로 떨어져나온 '추락하는 남자'는 지옥불로 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더이상 그에게는 희망이 없죠. 그의 손과 발, 머리는 절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몸통만 따로 떼어낸 조각은 또 다릅니다. 그의 힘줄은, 근육은 포기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분명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몸통은 마지막까지도 살아움직이고 있습니다. 

허우적거리는 팔이나 공포에 떨고 있는 얼굴은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게만 보이지만 그의 몸통은 다릅니다. 세포가 모두 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그의 몸통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삶의 의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니면 혹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일까요. 삶의 희망도 의지도 없이 눈 앞에 맞닥뜨린 지옥불로 떨어지는 와중에 팔과 다리, 머리는 힘없는 저항을 해보지만 몸은 곧 닥칠 고통에 맞서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예감한 몸은 마지막으로 생의 감각을 한껏 터뜨리고 있는 것인지도요.

분명한 것은 '추락하는 남자'의 몸통은 그 무엇보다도 절실함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삶의 의지와 열망은 더욱 불타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기도'는 어떤가요. '기도'하는 여인은 생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언뜻 평화롭고 안락한 몸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녀의 몸에는 힘이 가득 들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녀의 살은 부드럽고 매끈하지만 그녀는 몸에 힘을 가득 주고 있습니다. 특히 가슴과 배를 보세요. 무척 단단한 근육질 몸매입니다. 

보통 기도는 가지런히 모은 두 손으로 표현됩니다. 또는 머리(얼굴 표정)를 통해 표현되기도 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두 눈을 감거나 하늘을 향하여 든 채 눈을 뜨고 간절한 떨림을 전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로댕의 '기도'는 기존의 주인공인 머리와 두 손을 떼어냈습니다. 오로지 몸만으로 기도의 간절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

그녀는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경제적 어려움, 신체적 고통, 감정의 우울, 인간관계의 피폐함을 호소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바라는 그 무엇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산다는 것은 수많은 도전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사람들은 죽음보다는 삶을 좋아하지만 삶 또한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여인의 기도를 추측하며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내용은 수만가지가 되고도 남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고통없는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 왠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의 몸이 이리도 힘이 가득할 리는 없을테니까요. 그녀는 분명 살아내기 위한 힘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절망보다는 희망이 있기에 기도를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 조각 또한 머리와 팔을 떼어냄으로써 삶의 의지를 더욱 강렬히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머리와 손을 붙여넣었다면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기도를 하고 있는 여인의 절실함을 전달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의 전형을 표현한 많은 예술 작품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것들은 모두 기도의 행위,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간절함 또한 어느 정도 전달이 되기도 하지만 이 여인의 몸이 전달하는 것처럼 삶에의 강한 의지를 전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이 순간 그녀의 기도는 진심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얼굴로는 거짓 표정을 지을 수 있고 손을 모으는 것은 요식 행위일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몸의 상태는 거짓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지는 죽음을 앞두고 더욱 강해질 수도 있고 생의 한 가운데에서 더욱 필수적일 수도 있습니다. 제목을 보기 전까지는 단순한 조형미를 표현한 것으로만 보였던 로댕의 두 조각은 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삶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절실한가요' 

우리는 조각 속의 남자나 여자처럼 지옥불에 떨어지고 있지도 않고 삶의 고통에 처해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살아가고 있겠지요.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겠지요. 생 또는 삶에 대한 우리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한 번 측정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몸은 얼마나 깨어있을까요. 온 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있나요.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절실함의 문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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