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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Apr 07. 2021

[9] 사랑과 희생의 숭고함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마농'

반성과 회개를 통해 신에게 용서를 받는 것은 진정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 사이에서도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는 행위는 동등하게 숭고하고 아름답다.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함은 오페라의 가장 대표적이고 인기있는 주제 중 하나다. 


가장 인기있고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인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가 바로 사랑과 희생의 숭고함에 관한 이야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술과 춤으로 흥청망청 파티 라이프를 즐기는 여인이 순수한 남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에 눈뜨고 그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레퍼토리는 지극히 통속적이지만 영원히 감동적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 Opera) '라 트라비아타' 한 장면

비올레타는 향락적인 삶을 살아가는 파리의 매춘부로 몸을 혹사한 결과 병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로지 자유와 즐거움만을 추구하면서 죽기까지 이러한 삶을 유지하고자 한다. 어느날 자신을 오랫동안 흠모해온 알프레도를 소개받고 그의 뜨거운 사랑 고백을 받지만 비올레타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이 낯설기만 하다.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끊임없이 부유하고자 하는 마음과 진정한 사랑 속에서 행복을 느껴보고자 하는 마음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비올레타에게 알프레도의 저돌적이면서도 진실된 사랑은 결국 그 결실을 맺게 된다. 파리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 마을에게 서로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두 사람의 일상은 그러나 조금씩 균열되기 시작한다. 

비올레타가 전 재산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알프레도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파리로 떠난다. 그 사이 알프레도의 아버지가 비올레타를 찾아와 자신의 아들과 헤어져달라고 부탁한다. 알프레도의 탈선으로 가문의 명예에 타격을 주어 결혼을 앞둔 알프레도의 여동생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올레타는 잠깐동안 알프레도를 떠나 있겠다고 하지만 알프레도의 아버지는 완전히 떠나가 달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알프레도와 비올레타는 어울리지 않으니 다른 사랑을 찾으라는 말과 흔한 남녀간의 사랑이 그러하듯 결국 알프레도도 사랑이 식어 비올레타를 떠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비올레타의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는다. 

절망한 비올레타는 오로지 알프레도를 위하는 마음에 자신에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을 포기하기로 하고 떠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의 배신으로 마음 아파할 알프레도를 옆에서 잘 위로해주라는 말을 남기고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에게 이별의 편지를 남기고 떠난다. 

역시나 비올레타가 떠나간 이유는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을 배신한 비올레타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괴로워하는 알프레도를 향해 아버지가 부르는 아리아는 바리톤의 점잖으면서도 호소력이 짙은 목소리로 애정과 애절함이 조화를 이루며 마음을 울린다.

https://youtu.be/gbJYvh8D1Rc

하지만 알프레도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비올레타를 찾아 파리의 파티장으로 간다. 비올레타가 두폴 남작과 함께 나타나자 알프레도는 남작과 도박 게임을 해서 이긴다. 알프레도는 비올레타와 대면하지만 비올레타는 남작을 사랑한다면서 알프레도에게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분노한 알프레도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도박으로 딴 돈을 비올레타에게 뿌리며 모욕한다. 

죽음이 가까워진 비올레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떠나온 자신의 희생과 진심이 반드시 알프레도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알프레도의 아버지는 비올레타에게 행한 자신의 비정한 행동을 반성하며 알프레도에게 진실을 말했다고 편지로 전한다. 비로소 모든 사실을 알게된 알프레도는 비올레타를 찾아가고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품에서 행복과 평화 속에서 영원히 잠이 든다. 

조건과 신분을 뛰어넘어 오로지 사랑 하나로 연결된 남녀와 이를 반대하는 부모,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과 오해에서 비롯된 복수, 결국 다시 만나게 되지만 죽음으로 끝을 맺는 비극의 드라마는 참으로 통속적이고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야기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마음에 가 닿으면 이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운 마음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끊어놓는 행위는 아무리 아버지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기적이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랑의 배신으로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그럼에도 사랑했던 연인에게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비열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자신에게는 단 하나도 좋을 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역을 도맡으면서까지 희생한 비올레타의 행위는 얼마나 안타까우면서도 애처로운지 모른다. 

이러한 감정의 조각들은 오페라의 음악으로 높은 파도를 일으키며 고조되었다가 어느새 잔잔히 가라 앉으며 마음 속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오래도록 기억된다. 특히나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상대는 오로지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비록 시대착오적으로 생각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뛰어넘는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어리석고 이기적인 행동과 뒤늦은 후회를 모두 감싸안는, 어쩌면 용서를 뛰어넘는 크나큰 포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 Opera) '마농' 한 장면

포용이라는 것은 애초에 용서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해도, 어떤 선택을 해도, 얼마든지 포용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만큼 숭고한 것이 있을까.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는 또 다른 주인공을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에서 만날 수 있다. 

파리로 가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아름다운 소녀 마농은 그녀의 지나치게 들뜬 성격으로 인해 가족들에 의해 수녀원에 보내지기로 되어 있는 상태다. 중간에 사촌 레스코를 만나 안내를 받기 위해 내린 정거장에서 마농은 사촌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될 여러 인물들을 만난다. 

아름답게 차려입고 보석으로 치장한 여성들을 보며 화려한 인생을 꿈꾸는가 하면 그녀를 탐하는 늙은 귀족으로부터 추파와 유혹을 당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길을 나선 청년 데 그리우스를 만나는데 그는 그녀의 남은 생애동안 진정한 사랑으로 자리하게 된다.

두 사람은 단숨에 사랑에 빠진다. 마농이 수녀원에 가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 그리우스는 그녀와 함께 도망을 가기로 한다. 서로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꿈꾸던 두 사람은 하지만 마농을 탐하는 귀족의 유혹과 데 그리우스를 집으로 데려가려는 아버지의 계획에 의해 헤어지게 된다. 

특히, 사촌 레스코와 함께 두 사람이 있는 곳을 알아낸 늙은 귀족은 마농에게 접근해 데 그리우스가 그날 밤 아버지에 의해 납치될 계획이라고 알려준다. 만약 이를 막는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거라며 대신 자신에게 오면 부와 사치를 누릴 수 있다고 유혹한다. 어린 마농에게 화려한 삶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고 마농은 결국 데 그리우스가 아버지에게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린다. 

파리의 잘 나가는 매춘부가 된 마농은 귀족들을 후리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어낸다.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누리게 된 마농은 그러나 데 그리우스가 마농이 떠난 것을 괴로워하다 신부가 되어 수도원에 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https://youtu.be/J5kI136uDK8

그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고 둘이서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농에게 데 그리우스는 매몰차게 대하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농은 어떻게 해서든지 데 그리우스를 유혹해 그와 이루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맺고자 한다. 

결국 마농의 사랑에 굴복한 데 그리우스는 마농과 함께 하기로 한다. 하지만 마농의 사치하는 삶의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아 곧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고 마농은 데 그리우스에게 파티에 가서 도박을 해 돈을 벌자고 유혹한다. 

도박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지만 돈이 필요하다는 마농의 애원에 데 그리우스는 도박판에 뛰어든다. 초심자의 행운에 따라 데 그리우스는 연승을 이어가고 마농은 쌓여가는 돈을 보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돈을 잃은 귀족은 데 그리우스와 마농이 사기를 쳤다며 경찰에 신고하고 두 사람은 체포된다. 

데 그리우스는 아버지에 의해 풀려나오지만 마농은 감옥에 갇히고 미국으로 추방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데 그리우스가 손을 써 마농을 중간에서 가까스로 가로챈다. 데 그리우스는 마농에게 앞으로 함께 할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마농은 이미 병들고 지쳐 죽음을 바라보는 상황이다. 

마농은 자신이 데 그리우스에게 가한 모든 상처와 그녀로 인해 그가 겪어야만 했던 수치심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 데 그리우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는 했지만 향락을 추구하는 자신의 허영과 욕심으로 인해 많은 유혹에 빠지게 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한다. 변덕스럽고 쉽게 흔들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데 그리우스와 같은 진실된 사랑을 만났음에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호기심이 많고 화려한 삶을 추구하는 성향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이러한 성향을 가진 아름답고 어린 소녀가 혼자서 세상의 풍파에 맞서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 바른 길로 인도된다면 그녀의 삶은 달라졌을까. 눈에 띄는 미모의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세상, 특히나 그녀를 탐하는 돈 많은 남자들로 인해 수많은 유혹에 시달린 마농은 자신의 허영을 채우는 쉬운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마농을 보고 한눈에 반해 평생을 함께 하리라 마음 먹은 데 그리우스는 그러나 오로지 사랑 하나만으로는 그녀를 붙들어 둘 수 없었다. 마농과의 이별 이후 데 그리우스는 세속적인 사랑이나 생활과는 절연하려고 마음을 먹을 정도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눈 앞에 다시 나타난 마농에게 이내 무너지고 만다. 그러한 데 그리우스를 향해 그의 나약한 마음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사랑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마농에 대한 그의 사랑은 너무도 커 다른 것으로는 대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마농의 사치하고 향락적인 삶을 바로 잡아주지 못한 것, 그녀를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지 못한 것 등 마농에게 휘둘리기만 하면서 살아온 것에 대해서도 데 그리우스를 탓할 수는 없으리라. 오히려 마농에게 이끌려 온갖 상처와 수모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한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 하고자 하는 데 그리우스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팔에 안겨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면서 마농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데 그리우스에게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데 그리우스에게는 마농을 꾸짖거나 마농을 용서하거나 하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이미 처음부터 용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너무도 사랑해서 용서라는 말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용서가 숭고한 것이라면 사랑은 존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어쩌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스네의 오페라는 말한다.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사죄도 용서도 아닌 그저 사랑일 뿐이다. 인간을 완성하는 오직 한가지, 그저 사랑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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